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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고향<106>|경주정씨|신라왕업의 개국공신…정씨중에선 큰집격|글 길진현기자, 사진 장충종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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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정씨는 김·이·박·최에 이은 우리나라 5번째 대성이다.
그 먼 시조는 아득히 2천여년전 사로6촌장의 한사람인 비산진지촌장 지백호.30여본이 넘는 우리나라 정씨 가운데 지나에서 귀화해온 서산정씨를 빼고는 모두가 그의 후손으로 일컫고있다.
경주정씨는 그중에도 정통, 맏집의 긍지릍 지녀온다. 경주라는본관읕 처음 쓰게된 득관조 정진후(고별평견사·문정공)는 지백호의 42대손으로 전한다.
경주정씨의 족보는 동래 연일하동등 근세에 명성을 펼친 다른 정씨 득관조들이 모두 경주에서 갈라져나간 것으로 밝히고 있다.

<한국에 40만명>
정작 경주정씨는 동래·연일등「작은집」들보다 명성은 뒤졌으나 남한에 8만가구, 약40만명으로 1백60만 전체 정씨의 25%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숫적으로는 동래정씨에 이어 두 번째.
신라1천년 왕업에 개국공신인 6부중에서도 경주한복판을 차지한 정씨들이 숱한 사연을 엮었으련만 전해지는 이름은 신라말년 청해진을 근거로 동아시아의해상무역권을 독점했던 장보고의 동지 정년 정도. 그는 젊어서 단짝친구 장보고와 함께 지나 당나라에 건너가 무관으로 입신했다.
당시 황해에 날뛰던 해적들로 모국 신라사람들이 피해를 입는것을 보고 장보고가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신라조정을 설득, 청해진(전남완도)을 근거로 해적들읕 소탕하고 황해 남해항로의 무역권을 독점하게되자 뒤따라 귀국, 장보고의 오른팔 노릇을 했다.
고려조의 경주정씨 인물로는 정극온 (이부상황) 정이기 (부마) 정현영 (호부상서) 정휘 (문하평리)등이 부별사에 올라있다. 정휘의 아들인 정희계 (양경공)는 이성계의 쿠데타에 참여, 조선이 들어서자 개국1등공신으로 봉해지고 좌삼찬· 변한성부사를 지냈다. 조선조에 경주정씨는 15명의 문과급제, 30명의 무과급제자를 냈다.
그중 가장 추앙받는 이름은 임진왜란 7년전쟁의 벽두, 나라의 관문인 부산진을 지키다 장렬히전사, 첫 순국으로 기록된 흑의장군 정발.
득관조 정진후의 13대손,정허계의 6대손인 정발은 25살에 무과에 울라 해남현감·거제현렴위원군수등을 거쳐 왜란이 나기 석달전 부산진검절제사로 부임했다.
서기1592년4월13일 유사이래 대륙을 노략질하던 일본 삼도 (본주·구주·사국)왜구들이 풍신수길의 통솔아래 총집결, 전면침략을 감행하는 총성이 새벽안개속 부산앞바다를 뒤덮었다. 5백여척 병선에 나누어 탄 침략왜구의 1진 15만8건7백여명. 소서행장등 6명의 장수 지휘였다.
정장군은 절영도(영도)순찰중 왜법전위와 맞부딪쳐 수백명을 참살했으나 수가 달려 본성으로후퇴, 성문을 닫아걸고 굳게 지켰다.
검은군복을 입고 진두에 나서 군민을 지휘하는 장군의 모습에서 왜병들사이에 「흑의장군」의 명칭이 붙었다. 다음날 적의 총공격에 장군을 중심으로 뭉친 군민은 남녀노소없이 마지막 한사람까지 적을 무찔렀으나 중과부적, 적의 조총에 장군이 전사하고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장군은 성을 지키며 인근고을에 특사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지만 왜병의 세력에 놀란 인근고을수렴들은 대부분이 도주, 왜구는 부산진을 점령한뒤 거의 큰저항없이 서울까지 진격했다.
장군의 용전사실은 전쟁기간중 조정에도 알려지지 않은채 묻혀있었다.
난후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황신이 왜장 평조신으로부터 회고남을 들으면서 알게됐다.
평조신은 장군의 무용을 극찬하고 왜군이 조선을 침공당할시『부산과 동래에서 약간 곤란읕 겪였을뿐 그후는 무인지경이었다』고 술회했다고 한다.
뒤늦게야 조정에서는 그에게 병조판서를 추증하고 의정부좌련성겸 판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잠을 가증, 충장공의 시호를 내리는한편 동래부사 송상현과 함께 사당(충렬사)을 지어 배향했다.
충렬사는 현재도 부산시동래구안악동에 남아 근년 정화와 함께 향사가 받들어지고 장군의 동상도 세워졌다.
정발의 외아들 정흔은 충청도수군절제사등을 거쳐 1597년(맹조30년)재난때 조정에서 복수청을 창설하고 전국에서 모병하자 가산을 매각, 군수에 충당하는등 헌신적인 힘을 기울였으며1600년 무과에 합격, 맹부관이되어 사량만호로 출전, 왜구를 무찌른 공으로 전라수사로 승진했다.
그는 이괄난때도 공을 세웠다.

<정응룡도 순절>
이밖에 정응룡은 임진왜란때 의법을 일으켜 홍의장군 곽재우와 함께 분투하다 순절했다.그밖의 조선조인물로는 정효상(이조판서)정지의(병조판서) 정지례 (홍문관·예문관·대제학) 정지지 (예조판서추증)정인검 (이조삼판) 정문온(병마절도사) 정지운 (예조판서) 정승조 (사헌부감채) 정효항(2등공신) 정효종 (예조삼의) 등이 있다.
경주정씨는 해방후에도 많은 인재를 각계에 내고있다.
정계에서는 정규헌 (국희의원) 정동성 (국회의원) 씨등이 있으며 정희채문교차관은 국회의원을 겸직하고있다.
교육계에 정관섭(연세대교수) 정석활 (연세대교수) 정원규 (영남대공과대학장) 정종진(연세대경영대학원장) 정기택 (경북대교수) 씨등이 활약하고있고 법조계에는 대법원대법관 정태균, 정만조(부강판사) 정동윤(변호사) 씨등이 있다.
이밖에 정갑순 (전 치안본부 1부장) 정동우 (노동부이사관) 정영 (육군소장) 정형직 (일양약품주식희사사장) 씨등이 각 분야에서 활약중이다. 언론계에서 활약하던 정달선씨 (전 서울신문편집부국장)는 현재 「주간과학」지를 발행하며 종친회 회장직도 맡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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