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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창원 박사와 함께하는 ‘어린이 프로파일러 설록의 사건 일지’ <12> 훈민정음 상주본을 둘러싼 사건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오은우

훈민정음 상주본은 정말 불에 타버렸을까

사라진 보물 ‘초조대장경’과 의문의 인물 ‘M’에 대한 추가 단서가 발견되지 않은 채 겨울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됐다. 다리가 다 나은 진혁은 축구부 훈련과 주말리그 시합 출전에 전념했고, 대홍이는 학교를 마친 후 학원과 인터넷 강의로 이어지는 ‘공부 벌레’ 생활로 돌아갔다. 홍주만 새벽 권투와 방과 후 태권도 수련을 마친 뒤 표박사범죄과학연구소로 달려와 설록과 함께 보물 찾기를 계속했다.

그동안 설록과 홍주가 밝혀낸 사실 중 가장 의미 있는 것은 이무중 검사 살인범인 박상복이 설록에게 말했던 ‘고우니 화장품 회장’에 대한 이야기였다. 고우니 화장품 회장은 골동품업계에선 유명한 ‘큰 손’이었다. 고가의 골동품을 팔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누구보다 먼저 연락해서 전문가와 함께 진위 여부를 평가한 뒤 가치있는 문화재일 경우 거액을 주고 사곤 했다. 그렇게 구입한 문화재급 보물들을 회사 소유 박물관에 전시하고 문화재청에 신고해 국보나 보물 지정을 받아왔다.

초조대장경으로 얽힌 한국과 일본

대구의 골동품 시장에 나타난 ‘고려 초조대장경’ 목판 인쇄본 역시 그중 하나다. 다만, 초조대장경의 경우 먼저 문화재청에서 국보 제284호로 지정한 뒤 고우니 화장품 회장이 구입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 외무성이 “한국에서 국보 제284호로 지정한 초조대장경은 일본 ‘안국사(安國寺, 일본명 안코쿠지)’에서 도난당한 일본 문화재”라고 주장하면서 한국 정부에 반환을 요청하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인도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낙엽에 기록했던 내용들을 중국에서 목판에 새겨 ‘대장경’으로 만들고, 이를 고려에서 들여와 수정하고 보완해서 만들었던 ‘초조대장경’. 원본인 목판은 몽골의 침략 전쟁 중 모두 불타버리고 종이에 인쇄된 책들만 남았는데, 그 중 600권 정도가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안국사’에 보관돼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중 상당수가 도난당했고 갑자기 한국에서 일부가 나타나 국보로 지정되었다는 것이 일본 측 주장이다.

하지만, 한국 전문가들은 일본에서 도난당한 초조대장경과 한국에서 국보 제284호로 지정된 것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우선, 일본에서 도난당한 것은 책 형태인데 한국에서 국보로 지정된 것은 두루마리 형태다. 또한, 일본에서 도난당한 초조대장경에는 ‘발원문’이 없는데, 한국 국보 제284호에는 마지막에 ‘발원문’이 있다는 것이다. 초조대장경의 원본 목판은 하나지만 그 목판으로 찍어낸 인쇄본은 여러 개가 있으니 일본에서 도난당한 것과 한국에서 국보로 지정된 것이 서로 다른 초조대장경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문제는 고우니 화장품 회장이 누구를 통해 어떻게 구입했는 지를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가보인지, 절이나 유적지 혹은 남의 집에서 훔친 것인지를 따지지 않고 거래하는 한국 골동품 시장과 문화재 관리제도의 구조적 문제 때문이다. 어쨌든 고우니 화장품 회장은 자신의 박물관에 가장 대표적인 보물로 전시하고 있던 국보 제284호 초조대장경을 둘러싸고 한일 양국 간 첨예한 외교적 분쟁이 발생하자 초조대장경을 어딘가에 감춰버렸다.

그 때, 고난시에서 서점을 운영하는 김 선생에게 ‘회장님 운전사’인 동창생이 맡긴 것이 ‘국보 제284호, 초조대장경’이었다. 물론 진위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의문의 인물인 ‘M’이 남긴 메시지들은 그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게다가 제주에서 이무중 검사를 살해하고 무엇인가를 훔쳐냈던 박상복이 다시 ‘고우니 화장품 회장’을 언급한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갑자기 날아온 훈민정음 상주본 화재 소식

설록과 홍주가 한창 고우니 화장품 회장과 초조대장경 문제를 조사하고 있을 때, 2층에서 홍두재 연구원이 계단이 부서질 것 같은 큰 소리를 내며 헐레벌떡 뛰어 내려왔다.

“큰 일 났어, 불났대, 불에 타버렸대, 훈민정음이!”

그러자 법과학 실험실에 있던 방구름 연구원이 소화기를 들고 뛰어나왔다.

“불이 났다고? 어디야, 어디?”

두 연구원이 허둥거리는 모습을 본 설록과 홍주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훈민정음이 불에 탔다면 박물관에 잘 보관돼 있는 간송본 얘기는 아닐 테고, 상주본 말인가요?”

설록의 질문에 홍두재가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컴퓨터에서 인쇄한 신문기사를 내밀었다. 소화기를 바닥에 내려놓은 방구름이 인쇄된 기사를 낚아채 큰 소리로 읽었다.

“국보급으로 평가되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진 52세 배모씨의 집에서 불이 났다.”

“뭐야, 훈민정음이 불에 탄 게 아니라 훈민정음이 있는 사람의 집에 불이 난 거네.”

방구름이 홍두재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누나, 지금으로선 속단할 수 없어요. 불에 탄 집 안에 훈민정음이 숨겨져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설록의 이야기에 아픈 이마를 문지르던 홍두재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방구름을 째려보았다.

“설마, 엄청난 국가적 문화재를 그렇게 허술하게 보관하고 있었겠어?”

홍주가 방구름의 팔짱을 끼고 홍두재를 놀리듯 혀를 내민 뒤 가볍게 말했다. 하지만 설록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지난번 표 박사님이 문화재청의 요청으로 배씨를 면담한 적이 있어. 그때 나도 함께 갔었고. 그런데 그 분은 보통 사람과 많이 달랐어. 무척 고집이 세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유형이었지. 학교에서 정규 교육은 많이 받지 않았지만 어르신들께 한학을 배우고 독학으로 한문과 우리 역사와 문화, 유물들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야.”

“아니 그런데 그런 사람이 왜 국보급 문화재를 박물관 같은 데 보관하도록 하지 않고 숨기고 있었던 거지?”

홍두재의 얼굴은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배씨가 집을 수리하다가 훈민정음을 발견했다며 문화재청에 국보등록 문의를 한 뒤, 조씨라는 골동품상이 사실은 훈민정음이 자기 것인데 배씨가 헌 책 2상자를 30만원에 사가면서 슬쩍 훈민정음을 끼워서 가져갔다고 경찰에 절도신고를 했어요.”

“그래서?”

홍두재와 방구름, 홍주 세 사람이 동시에 물었다.

“경찰에서 수사하고, 검찰에서 다시 수사하고, 문화재청에서는 배씨에게 훈민정음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배씨는 화가 나서 훈민정음을 감춰버리고, 그러자 검찰이 배씨를 구속해 버렸어요. 그 사이에 조씨는 민사소송을 제기한 뒤 지인들을 증인으로 내세워서 법원으로부터 훈민정음 소유권을 인정받았죠. 그리고 나선 문화재청에 가서 훈민정음을 국가에 기증하는 기증식까지 거창하게 치렀어요.”

“훈민정음은 배씨가 숨겨두고 있는데 조씨가 실제 훈민정음도 없으면서 국가에 기증하는 공식행사를 했다고?”

“그래서 배씨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죠. 자기가 훈민정음 주인인데 오히려 도둑으로 몰려 구속되고,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조씨는 국가에 훈민정음을 기증한 애국자, 착한 영웅이 되었으니까요. 게다가 검찰과 문화재청이 훈민정음을 찾는다고 배씨가 노모와 형이랑 살고 있는 집 안팎을 다 뒤지면서 압수수색을 했어요. 그것도 여러 차례.”

“그래도 못 찾은 거야?”

“네. 배씨의 훈민정음 절도죄에 대해 1심 판결은 유죄, 징역 10년 형이었어요. 훈민정음을 내놓고 용서를 받으라는 법원의 메시지였다는 해석이 가능하죠. 배씨는 억울하다면서 항소했고, 항소심에서 판사님한테 ‘선처해주면 훈민정음을 국가에 내놓겠다’는 약속도 했어요.”

“그런데?”

“정작 무죄판결을 받자 배씨는 훈민정음을 내놓지 않고 있죠.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선 이미 배씨가 훈민정음을 외국에 내다 팔았다, 진공포장해서 어딘가에 냉동보관하고 있다, 집 주변 무덤가 땅속 깊이 파묻었다는 둥 여러 소문이 돌고 있었어요.”

홍두재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선언하듯 말했다.

“그럼 이번 화재사건을 배씨가 일부러 일으켰을 가능성도 있네.”

방구름과 홍주가 눈을 크게 뜨고 홍두재를 쳐다봤다.

“그게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같은 소리야?”

“가능성 말이야, 자작극의 가능성. 훈민정음이 불타버렸다고 세상에 거짓말을 하고 몰래 훈민정음을 팔아서 돈을 벌려고. 설록, 어떻게 생각해?”

“글쎄요. 항소심 재판을 받던 중 표 박사님이 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배씨를 면담하셨는데요, 배씨는 돈보다는 명예욕과 인정욕구가 더 강한 사람이라고 분석하셨어요. 배씨는 자신이 누구보다 문화재를 아끼고 지키는 사람이라는 인정과 평가를 받고 싶어했죠. 당시에 문화재청에 제출한 박사님의 자문내용도 ‘도둑이라는 누명을 벗겨주고, 그동안의 억울한 고초에 대해 책임 있는 당국자가 사과하고, 적절한 금전적 보상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배씨가 스스로 훈민정음을 국가에 기증하는 명예를 얻게 해 주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라는 것이었어요.”

방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문화재와 골동품을 많이 다뤄본 사람이라면 불이 난 뒤에 과학수사 현장감식이나 문화재 전문가들의 고고학적 분석이 뒤따를 것이란 것은 잘 알 테고, 그럼 훈민정음이 타버린 흔적이 있는 지 없는 지가 확인될 것이란 것을 알았을 텐데 그리 허술한 자작극을 할 리 없지.”

“일단, 자세한 후속 기사랑 방송 내용들을 좀 보고 표 박사님이 오시면 제대로 분석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배씨와 가족들의 행동과 말, 그리고 화재 발생 원인과 위치 및 신고 시점, 화재 진압 후 현장 조사 결과 등을 종합해 보면 단서가 나오고 그 단서들을 종합해서 분석하면 윤곽이 잡히겠죠.”

설록의 차분한 설명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홍주가 갑자기 소파 위에 놓인 쿠션들을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며 씩씩거렸다. 깜짝 놀란 홍두재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아니, 어른들은 도대체 왜 그래? 그깟 돈이나 자존심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훈민정음이랑 초조대장경이랑 소중하고 귀중한 국가적 보물인 문화재를 훔치고, 감추고…도대체 왜 그러냐고? 그러면서 만날 우리 어린이들 혼내고, 야단치고, 훈계하고 그러잖아!”

홍두재와 방구름 연구원이 서로 쳐다보면서 부끄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었다.

“그, 그러게 말이다. 우리도 어른이라면 어른인데 부끄럽다, 많이. 요즘 우리나라 보면 어른들은 다 물러나고 차라리 순수한 어린이들이 정치나 행정, 국방, 재판, 언론을 맡아서 하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설록이 고개를 흔들며 반론했다.

“지금 어른들도 어린 시절이 있었잖아요? 그땐 어른들 비판하고 나쁘다고 했겠죠. 그런데 커 가면서 달라졌죠. 변하고 타협하면서요. 그리고 그게 다 자녀, 우리 어린이들 위해서라고 말씀하시잖아요? 우리 어린이들도 지금은 순수한 마음이지만 똑같이 치사하고 이기적이고 바보같은 어른들로 바뀔 지도 모르죠.”

그 말에 홍주는 더 화가 나고 답답해졌는지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소리가 들릴 정도로 세게 쳤다.

“설록, 너나 그런 어른 돼. 난 그럴 바엔 차라리 어른이 되지 않겠어!”

홍주는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밖으로 뛰어 나갔다. 언뜻 눈가에 눈물이 비치는 것 같았다.

“홍주야 ! 홍주야 !”

홍두재가 급히 뒤따라 갔지만 바람같이 빠른 홍주를 잡을 수는 없었다.

표창원 박사는… 1966년생. 범죄심리학자. 탐정 셜록 홈스에 매료돼 경찰대학에 진학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경험하고 전문적인 범죄수사를 배우기 위해 영국으로 유학, 1997년 엑서터 대학에서 범죄학 박사를 받았다. 한국 최초 범죄심리분석관으로 활동하다 2001년 경찰대 교수로 임용, 2012년까지 재직했다. 퇴직 이후 표창원의 범죄과학연구소를 열고 범죄심리학에 관한 연구를 활발히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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