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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시니어 <3> 거울과 자화상] 말년 눈빛도 당당…수퍼 시니어로 살았던 렘브란트

중앙일보

입력

몇 년 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관리자급 워크숍을 할 때의 일이다. 황푸(黃浦)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천지개벽한 푸동(浦東)지구를 바라보며 덩샤오핑(鄧小平)의 유명한 ‘흑묘백묘(黑苗白苗)’론을 주제로 현장 강연을 듣고 있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이 말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뜻으로 중국식 시장경제를 대변하는 표현이다. 강연을 마칠 때쯤 누군가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흑묘백묘도 중요하겠지만 저에게는 지금 흑모백모(黑毛白毛)론이 더 절실합니다. 검은 머리든 흰머리든 빠지지 않고 버텨주는 비법 말이죠.”

일제히 폭소가 터져 나왔다. 오래전부터 심각한 탈모가 진행된 그의 머리에는 금방 셀 수 있을 정도의 머리카락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빡빡한 일정 때문에 피곤에 지친 일행들에게 멋진 패러디로 웃음을 안긴 것이다. 참석자의 상당수가 아침마다 거울을 보며 오늘은 또 얼마나 많은 머리카락이 빠졌는지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터라 그 유머는 공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중년은 거울이 두려워지는 시기다. 늦은 귀갓길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연히 거울을 바라보다가 낯선 사람이 거기에 서있음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란 경험이 있으리라. 소년과 소녀는 하룻밤 사이에 중늙은이로 변해 있었다. 마치 비바람에 우수수 꽃잎이 떨어져 나간 벚꽃나무의 애처로운 모습처럼 머리카락은 듬성듬성, 피부는 쭈글쭈글해져 버렸다. 전성기가 지난 자기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마치 직함 앞에 ‘전(前)’이란 글씨가 새겨진 명함처럼 어색하고 부담스럽다.

중년들이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또 있다. 사진찍히기다. 특히 여성들은 단체사진이라도 찍을라치면 서둘러 선글라스를 착용하거나 얼굴을 작게 보이려고 뒤로 물러서기 경쟁을 하느라 한바탕 법석을 치러야 한다. 그런 입장에서 지하철이나 식당을 가리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스마트폰에 자기 얼굴을 찍어 소셜 미디어에 올리는 젊은 여성들의 모습이 좋아 보일 리 없다.

하루 종일 자기 얼굴과 풍만한 몸매만 사진 찍어 올려 유명해진 아르메니아계 미국인 킴 카다시안의 행동은 더욱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는 배우도 가수도 모델도 아닌 딱히 개념을 규정하기 힘든 연예인이지만 어찌하였든 스마트폰과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덕분에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되었고 돈방석에 올랐다. 세상이 확 바뀐 것이다. 따지고 보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이 오늘날처럼 비약적인 발전을 한 데는 미국에서 ‘셀피’라 부르는 셀카 열풍이 단단히 한몫했다.

렘브란트가 그린 노년의 자화상(부문)

이는 나르시시즘, 극도의 자기애(自己愛)가 가져온 뉴미디어의 혁명이다. 스마트폰의 사진 기능 이전에 인간의 발명품 가운데 가장 유용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슬픈 발명품은 거울이다. 바로 자의식과 누군가와 비교하는 마음을 함께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그 복잡한 심리를 정면에서 다룬 작품이 그림동화집에 수록된 유명한 『백설공주』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
“왕비님도 아름다우시지만 백설 공주가 더 아름답습니다.”

여기서 거울은 주관과 객관의 차이를 의미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상대가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일정부분 간극이 있다는 뜻이다. 얼마 전 중년 인사 몇 명과 자리를 가졌는데, 참석자 가운데 한 사람이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 부서 여직원들 때문에 미치겠어요. 서로 얼마나 질투가 심한지 말 못해요. 조용히 나에게 와서 다른 여직원의 안 좋은 점을 일러바치고.내가 대화하는 목소리가 조금만 차이가 나도 특정인을 편애한다고 난리에요, 난리!”

조직 관리에 가장 어려운 점 가운데 하나가 질투다.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배 아픈 것은 절대 못 참는 게 사람들의 심리다. 사실 질투는 약이 없다. 그 무엇으로도 해결 안 되는 인간만의 특이한 감정이다. 그러자 다른 참석자도 자기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나름대로 직원들에게 잘 해주려 하는데, 상대방들은 도무지 마음의 문을 열려고 하지 않으니.”

사실 리더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라이벌 기업이 아니다. 함께 일하는 직원이다. 직원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공감이라고 하는 이름의 리더십이다. 가끔 이런 말을 하는 윗사람들을 만난다.

“내가 우리 직원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는 줄 알아? 나는 다른 사람과 달리 아랫사람들을 편하게 해주거든. 아랫사람들에게 물어봐!”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편하다는 개념은 윗사람이 평가할 문제가 아니다. 상대적으로 약자인 아랫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진짜 답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일수록 백설 공주에 나오는 마법의 거울 앞에 선다면 아마도 이런 잔인한 답변이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당신의 리더십 점수요? 낙제죠, 낙제!”

어쩌면 그것은 과거 나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 아무리 좋은 시어머니라도 없는 시어머니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을 직장으로 바꾸면 아무리 좋은 상사라도 없는 편이 더 좋다는 뜻이다. 멋진 부장, 인간적인 팀장이라도 자리를 비우면 부하 직원들은 훨씬 더 좋아한다. 억울하지만 현실이다. 거울은 진실을 말하니까. 수퍼시니어가 되고 싶다면 때로는 과감히 자리를 비워 줄 일이다.

나는 요즘 한 화가의 자화상에 부쩍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렘브란트의 작품들이다. 평생 35점의 자화상을 그린 반 고흐의 자화상도 물론 유명하지만 작품 수와 시간의 다양성에 있어서는 렘브란트를 따라가지 못한다. 렘브란트는 20대 초반부터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해 63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모두 75점의 자화상을 세상에 남겼다. 마치 연대기처럼 화가의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점점 주름살이 늘어가고 쭈글쭈글해진 만년의 자화상이 특히 내 시선을 끈다. 그는 왜 그토록 자화상에 집착했을까? 렘브란트가 ‘그림 속에 자서전’을 쓰고 있었다고 말하는 예술사가도 있다. 해석은 자유지만 거장은 말이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늙었을 때조차 자기 얼굴만은 항상 시선의 중심에 배치했다는 점이다. 비록 화려한 시절은 지나 말년에 남은 돈도 없고 비루한 처지였지만 내면에 뿜어져 나오는 눈빛만은 당당했다. 죽을 때까지 위축되지 않고 거장의 면모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수퍼시니어 정신이었다.

손관승 세한대 교수(전 iMBC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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