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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린 교과서와 완벽한 참고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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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더우기 제5공화국은 정의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모든 비능률, 모순, 비리를 척결하며…」새 교과서를 받아온 큰 아이의 『고등학교국사(하)』를 훌훌 넘기다 발견한, 이 책 마지막 문장이다. 미심쩍어 다시 읽어 보아도 틀림 없는 오문이었다.
설마, 하면서 한장을 되넘겨 이 교과서 마지막 절의 서두를 찾았다. 그것은 「오늘의 역사적 사명이란 좀 어색한 표제 아래 「우리는 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통하여 얻은 지혜를 오늘날 어떻게 조국의 발전에 기여해야 하는가?」로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두문장을 지나치면, 「따라서 오늘날과 같이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서 일대 격동기에 처해 있을 수록 과거 우리조상들이 이룩한 민족의 전통문화에 대한 올바른 비판파 선택을 명확히 하여,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기 위한 방향이 정립되어야만 바람직한 내일의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고, 주어가 없을 뿐더러 문맥도 어긋나고 논리적으로 불투명한 문장이 나타났다.
나는 여기서 이 책을 덮어 버렸는데, 그 것은 이 책 전부가 물론 이같은 오문과 졸문으로연속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더 뒤져보기가 말 그대로 민망하고 무서워졌기 때문이다.
이 부분의 교과서 필자는 어떻게 이처럼 어이 없이 잘못된 문장을 쓸 수 있었을까, 필자는 그렇다치고 이 원고를 검토한 사람은 무엇을 보았을까, 교정자는 무엇을 고쳤을까, 교과서 제작을 책임진 당국은 무슨 딴 생각을 했을까, 이부분을 가르쳤거나 가르칠 일선교사는 여기서 어떤 설명을 할 수 있을까. -이 연속된 자문들을 그 때 나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기 혀가 짧다고 「바담풍」이라 표기할 수 없고, 글을 쓴 사람이나 그것으로 교과서를 만든 사람이나, 그것에 의거해서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나, 우리 모두가 문맹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내가 한탄 했더니, 이 전말을 을은 대학선생들이 제각각 동조하며 말들을 보태기 시작했다.
한분은 교과서마다 맨앞에 으례 실려 있는 우리의 「국민교육헌장」의 첫 마디가 틀려 있다는 주장을 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깨닫고 혹은 져야 하는 것이지, 그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분은 감점당한 것이 못내 억울하다는 중학생 아이의 시험지를 본 즉, 네모안에 넣을 답이 교과서에 씌어진대로 가령 「지금」이 아닌, 그와 같은 뜻의 「이제」란 말을 넣어 틀렸더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러니 아이들이 교과서를 달달 외지 않으면 안되겠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학생들은 앞에서 인용한 오문을 오문인줄 알면서「혹은 모르면서」외어 답안을 작성해야 한다(!).
교육문제에 대해서는 모두가 일가견을 갖고 있지안 이 사석에서의 진지한 잡담들로부터 내가 크게 깨우친 것이 대학입시 문제였다. 학력고사가 치러진 날 신문에는 으례 「교과서만 충실히 공부하면 풀 수 있는 문제들을 출제했다」는 출제위원의 설명이 보도되고, 그래서 나도 당연히 이 출제방침을 좋게 보았다.
그러나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분의 설명을 들으니 그게 아니였다. 교과서를 중심으로 학력고사 문제를 작성하니까 입시생들은 교과서와 참고서를 열심히 외거나 풀어보게 되고 그러다 떨어진 아이들은 재수하면서 더 많이 외고 풀어 지난해보다 더 좋은 점수를 따게 된다.
그런데 프랑스처럼 가령 「래비·스트로스」의 한 문장을 옮겨 놓고 이 문장을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에 의거하여 비판하라』라고 문제를 낸다든가, 우리 신문에도 해외화제로 소개되었지만, 사진 한 장을 보여 주고 『이것이 흰 얼룩말인가 검정 얼룩말인가? 문장으로 설명하라』고 출제한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미국의 국민학생들은 교과서를 학교에 놓아두지 집으로 가져가지 않는다. 그러면 그 아이들에게는 숙제가 없는가. 작년에 미국서 돌아온 친구는 거기에도 숙제가 무척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1년동안 국민학교 3학년 과정을 다닌 그의 아들이 학교에서 받아온 숙제는 가령 우주선 콜럼비아호의 내부 구조를 그려 오라는 것이었단다. 물론 그의 교과서나 노트에도 없는 숙제다.
그래서 그 아이는 도서관에서 백과사전을 뒤지기도 하고 시사잡지나 과학지를 찾아내 이리 맞추고 저리 짝지어 가며 우주선의 내부를 그린다. 이 때 그 아이가 얻게 되는 지식은 차치하고라도 책과 참고자료가 필요하다는 관념, 거기서 필요한 부분을 찾아내는 법, 찾아낸것들을 재구성하는 훈련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과서 중심의 공부는 학교수업으로만 그치게 하고 보다 폭넒게 읽고 생각하고 추리하는 습성을 어려서부터 키워나감으로써 올바른 사고인, 참다운 민주시민의 자질을 함양시킨다는 것인데 여기서 우리의 화제는 우리학생들의 참고서가 너무 완벽하다는 데서 빚어진 폐단으로 다시 발전했다.
참고서가 시시콜콜하게 모든 것을 설명하고 풀이해 주기 때문에 다른 책을, 하다 못해 사전이라도 찾아볼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러니까 학생들의 책상서가에는 전과 참고서라든가 문제집만으로 채워지게 되고 여타의 책들은 읽기는 커녕 도무지 참조할 이유가 없어진다.
어려서부터 국어사전을 찾는 버릇이 없었기 때문에 대학생이 되어서도, 가렴 「스스로 자기의 방종을 억제함」이라 풀이된 자율과「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제마음대로 행동함」이란 자유를 구별 없이 같은 말로 혼동해서 사용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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