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범죄정권…금융제재 못 풀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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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가 7일 오전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패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태성 기자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 대사가 7일 북한을 '범죄 정권(Criminal Regime)'으로 규정했다. 버시바우 대사는 이날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금융 제재를 둘러싼 최근의 북.미 갈등과 관련, "북한은 외화 소득의 대부분을 범죄 행위에서 충당하고 있는 범죄 정권"이라며 "정권 주도로 마약을 밀매하고 (위폐를 제조해) 아일랜드 공화국군이 사용토록 하는 등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정치적으로 금융 제재를 풀 수는 없다"고 말했다.

대사는 "미국은 미 국내법에 따라 취해진 북한에 대한 금융 제재 문제를 북한과의 협상 대상으로도 삼지 않을 것"이라며 "미국의 법 집행이 6자회담의 걸림돌이 돼선 안 된다"고 기존의 입장을 다시 확인했다. 특히 "다른 나라의 돈을 정권 차원에서 위조한 것은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이후 처음"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북한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지도자가 과오를 범해도 변화를 일굴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며 "북한이 외화 위조, 마약 밀매 등을 중단하는 변화를 보인다면 상응하는 행동을 취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또 "북한이 변화하지 않을 경우엔 우리 스스로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미국 고위급 인사의 방북과 관련, 대사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면서도 "그런 방문을 위해서는 기본적 신뢰 형성을 위해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며 유보적 태도를 보였다. 그는 8일 서울에서 개막되는 북한 인권대회와 관련, "정치적 행사가 아닌, 보수.진보층이 모두 참가해 북한 주민의 생활을 바꿀 전략을 찾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북한을 '범죄 국가'로 지칭한 버시바우 대사의 발언에 대해 반기문 외교부 장관은 "6자회담 관련국들은 상대국에 대해 표현을 자제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태용 외교부 북핵기획단장도 "정부로선 6자회담이 중요 국면에 와 있는 만큼 대화 상대방을 자극하는 발언은 자제돼야 한다는 입장"이라며 유감의 뜻을 밝혔다.

◆ 왜 그런 표현했나=북한을 '범죄 정권'으로 규정한 버시바우 대사의 발언은 무척 이례적이다. 외교관이라면 피해야 할 극도의 직설적 표현이다.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을 연상시킨다.

그는 간간이 "북한이 변화한다면 상응할 행동을 취할 준비가 돼 있다"는 등 유화적인 이야기도 섞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톤은 북한에 대해 적대적이고, 자극적이었다. 이 때문에 6자회담에 미칠 파장이 적지 않아 보인다.

미국은 북한 핵문제를 다룰 6자회담 비공식 대표회의를 19일 제주에서 여는 방안을 제의했다. 내년 1월로 예정된 제5차 6자회담 2단계 회의를 앞두고 어떻게든 추진력을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취지다. 북한이 참석하지 않으면 무의미해진다. 외교부 당국자의 말대로 이처럼 '중요한 국면'에서 터져 나온 버시바우 대사의 발언은 악재(惡材)가 될 수 있다. 반기문 장관과 조태용 북핵기획단장까지 나서 유감을 표시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 같은 파장을 모를 리 없는 버시바우 대사가 왜 이런 발언을 했을까. 우선 돈세탁과 위폐 문제만큼은 6자회담과 결코 연계시킬 수 없다는 미국 측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북한은 최근 "미국이 금융 제재 해제와 관련한 회담을 회피하고 있는 조건에서는 6자회담 재개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6일자 북한 노동신문 논평)"며 미국을 압박했다. 이에 대해 "금융 제재 문제는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는 것이다.

또 부시 대통령이 지난달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의 회담에서 북한 김정일 위원장을 '폭군'이라고 부르는 등 미국의 대북정책이 다시 강경으로 돌아서고 있는 미국 내 분위기와 연관 짓는 분석도 있다.

관심은 버시바우 대사로부터 한 방 맞은 북한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다. 외교부 당국자는 "버시바우 대사의 발언 중 북한 정권에 대한 성격을 지칭한 말(범죄 정권)을 뺀 나머지 발언들은 그동안 미국 측 입장과 다르지 않다"며 파문을 잠재우려 애썼다.

서승욱 기자 <sswook@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미국의 대북 강경 발언 일지

▶2002년 1월=상하 양원 합동 국정 연설서, 부시 대통령 "북한은 국민을 굶기면서도 미사일과 대량살상무기로 무장하는 정권" "북한.이란.이라크, 이들과 연합한 테러리스트들이 '악의 축'을 이루고 있다"

▶2005년 1월=상원 인준 청문회, 라이스 국무장관 "북한은 폭정의 전초기지"

▶2005년 4월=백악관 기자회견, 부시 대통령 "김정일은 위험한 사람이며 국민을 굶기는 사람이고 거대한 강제 수용소를 갖고 있다" "김정일은 폭군"

▶2005년 12월=버시바우 미 대사 "북한은 범죄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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