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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성주읍에서 김천쪽으로 4km남짓 달려 영취산 모퉁이를 돌아서면 눈앞에 다가서는 아늑한 마을 성주군 월항면 대산동일. 행정구역상의 동명보다 한개(대보)마을로 더욱 잘 알려진 성산 이씨의 아성.
마을 전체 80여호 2백 50여명이 몽땅 한집안이다.
입향조는 조선 초기 진주 목사를 지냈던 이우. 그가 조상 대대로 살아온 성주읍 내에서 「한개」로 이주한 내력은 확실치 않다.
다만 조선 초기 영남 지방 교통의 요충지였던 성주목에 역사가 들어서고 말과 역을 관리하는 중인들이 득실거리자 「성주는 체통있는 양반이 살 고을은 못된다」고 해서 문중의 못자리를 「한개」로 옮겼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을 뿐-.
이후부터 한개 이씨는 개화기를 맞는다.
비명에 숨진 사도세자에게 끝까지 충절을 지켰던 무관 이석문, 영조 때 명신 이석구(사헌부집의), 숱한 선정으로 덕망이 높았던 이원조(공판), 이귀상(홍문관 교리), 조선 말엽의 이름 높던 성리학자 이진상 등은 한개 이씨를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인물들이다.
아직도 집집마다 조상의 위패를 모신 가묘를 보존, 말썽을 부리는 손자가 있으면 가묘 앞에 끓어 앉혀 불호령을 내린다. 누가 뭐라하든 삼년상을 지키고 제사 때는 유건을 쓰며 5백년 유가의 가풍을 고집스럽게 잇는다.
이석문이 사도세자를 추모해 만든 사립문(북비)도, 하인들이 살던 초가도 그대로 남아있다. 솟을대문을 지나 바깥 사랑채를 거쳐 안채로 들어서느라면 마치 타이머신을 타고 조선 중기쯤으로 거슬러 온 듯한 느낌이 든다. 이 때문에 「한개」는 종종 「대원군」 등 정통 사극 영화를 촬영하는 전천후 스튜디오로 인기가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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