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철학의즐거움 생각하는 삶을 위하여(엄정식 서강대교수·철학)-눈의 세계와 전신의 세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소크라테스」의 충격적인 죽음을 지켜본 「플라톤」(platon)의 비애는 컸다. 그는 원래 명문귀족의 자제로서 『아폴로 신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질정도로 풍모가 당당한 사나이였고 일찌기 정치에 뜻을 둔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최대의 지혜와 정의의 인간』이었던 「소크라테스」가 못다한 일을 완수하는데 자기의 생애를 바지기로 결심한것이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유업을 물려 받아 집요한 추구를 벌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불변하는 「진리」였으며 동시에 그러한 진리를 담은 「참된 지식(epistem)」이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프로타고라스」를 위시한 제변론자들의 상대적 진리가 아니며, 따라서 지식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단편적인 「소견(doxa)」이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얻을수 있는 지식은 감각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상대적 진리일 뿐이다. 어떻게 우리는 참된 지식에 도달할수 있을것인가? 「플라톤」의 이른바 『이데아 (Idea)설』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형성된 이론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세계에는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수 있는 구체적인 사물들 외에 그 사물들의 「이데아」혹은 형상이라는 것이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흩어져있다. 철수도 사람이고 순이도 사람이며 영희도 사람이다. 우리가 이들을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사람」이라고 할수 있는 어떤 공통된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영희」라는 이름을 사용할때는 영희라는 개인을 가리키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냥 「사람」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무엇을 지칭하는가. 영희나 철수 혹은 순이를 가리킬수 있으나 그들은 사람의 예에 불과한것이지 사람 자체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은 사람들과 태어날 사람들을 포함한 인류 전체를 가리킬수도 없다. 도대체 사람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인지 알수 없다면 영희가 사람이라는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플라톤」의 답변은 간단하고 명료하다.
「플라톤」에 의하면 「사람」이라는 단어는 사람의 「이데아」를 지칭하는 것이며 『영희가 사람이다』라는 문장은 영희가 「사람」이라는 이데아를 「나누어 가졌다」, 거기에 「참여했다」혹은 그것을 「모방했다」는 뜻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사람의 「이데아」야 말로 사람의 본질이며 모든 개별적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이 알수있게 하는 이유이고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 이데아를 많이 나누어 가졌거나 철저하게 모방한 사람일수록 더욱 인간다운 인간이 될수 있으며 따라서 바람직한 인간이 될수도 있다. 다른모든 사물도 마찬가지다.
책상은 「책상」의 이데아를 모방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정도 책상이 될수 있으며 그 이데아와 많이 닮아있을수록 책상다운 책상이 될수있다. 무엇의 이데아이든 이데아는 완전하고 영원불변하는 것이며 가장 실감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상의 산물도 아니고 기하학적인 도형도 아니며 실제로 존재하는, 그러나 실재를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서는 파악할 수없는 그 무엇이다.
이러한 본질들의 세계를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라고 부른다. 그는 『자, 생각해 보라! 하나의 세계는 정신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눈의 세계이다... 첫째것은 예지의 세계이고 둘째것은 눈에 보이는 세계다』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진리를 터득하고 참다운 지식을 획득하려면 「생성과 소멸의 황혼을」 멀리하고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불변하는」 이데아의 세계에 대해 명상해야 한다는것이다.
요컨대 사람의 이데아를 알아야 내가 사람인지 아닌지도 확실히 알수 있으며 이러한 지식만이 절대적인 진리가 될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데아의 세계를 안다는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인간적인 상황에서 함부로 용납되는 것도 아니다.「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이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동굴의 벽만을 향해 있도록 쇠사슬로 묶여져 있는 죄수들과 같다.
이 죄수들이 볼수 있는것은 벽에 비친 희미한 그림자들뿐이다. 그중에 한사람이 마침내 사슬을 끊고 동굴을 탈출해 나간다. 그는 밖으로 뛰쳐나와 찬란한 태양에 비친 영롱한 사물들을 본다. 드디어 태양에 눈이 멎었을때 잠시 시력을 잃는다. 그것은「에크하르트」(M.Ekhart)와 같은 신비주의자가 신을 경험하는 장면과 비교할수도 있으며 선사인 청원이 각고의 수도 끝에 결국 『산은 「산」 이다』 라고 부르짖는 순간과도 같다. 자기가 지금까지 보아왔던것이 한낱 희미한 그림자들의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다시 동굴에 돌아와서 자기가 겪은 놀라운 경험을 사람들에게 전하나 아무도 그것을 곧이 듣지 않을뿐 아니라 오히려 귀찮은 존재가 되어 찢겨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비극적 죽음에 대한 가장 생생한 묘사이기도 한것이다.
우리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이렇게 요약할수 있을것이다. 첫째 그것은 모든 개별적 사물들을 규정하고 이것을 포괄한다는 점에서 보편적 성질을 가진다. 둘째 그것은 한낱 주관적 심리상태의 표현이 아니라 현실적 세계의 피안에 존재하면서 현실을 움직이는 원인이며 원리라는 점에서 객관적 실재성을 가진다.
세째 그것은 불완전하고 끊임없이 변하는 모든 것이 지향해야 하는 완전하고도 불변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영원한 이상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이렇게 특정 지워진 「플라톤」의 이데아설은 이미 단순한 형이상학적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삶 속에 파고들어서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인생관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소크라테스」의 절규는 「플라톤」에 의해서 이론적으로 체계화 된 철학의 모습을 갖추게되었다.
그러나 「플라톤」의 사상은 쉽게 이해될수 있는것도 아니고 누구나 실천에 옮길수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부정할수 있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따라서 서양의 철학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해석하거나 수정 혹은 극복하려고 애썼을뿐 오늘날까지 조금도 퇴색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플라톤」을 가장 철저하게 논박하고 나선 사람은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는 『「플라톤」은 위대하다. 그러나 진리는 더욱 위대하다(Amicus plato, sed magis amica verias)』고 외치며 철학의 본질인 비판정신을 바탕으로 방대한 또 하나의 철학체계를 구축했던것이다. 이제 진리는 이데아의 세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세계로 옮겨지고 있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