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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절염 저리가라, 얍! 은발의 태권V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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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남동구 만월사회복지관의 실버태권도 교실에서 평균 나이 70대 노인들이 발차기를 연습하고 있다. 태권도는 노인의 자세를 교정하고 신체 균형을 잡아주는 효과가 있다. 신동연 객원기자

‘실버 태권V’가 떴다. 하얀 도복을 입은 은발의 노인 10여 명이 허리를 곧게 펴고 ‘얏!’ 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주먹 쥔 팔을 앞으로 지른다. 무릎을 살짝 굽힌 채 방향을 바꿔가며 발차기를 하는 품새가 막힘이 없다. 쩌렁쩌렁한 기합소리를 내는 이들의 평균 나이는 70대. 7일 오전 10시, 인천 남동구 만월사회복지관의 실버 태권도 교실 풍경이다. 한편 이날 오후 4시, 서울 송파구 송파노인종합복지관에서는 노(老)검객의 깊은 숨소리가 공간을 메웠다. 흔들림 없는 시선이 칼끝에 모인다. 죽도를 쥔 양손을 머리 위로 끌어올렸다가 허공을 가르며 내리친다. 바닥과 종이 한 장 여유를 두고 스치며 걷는 발의 움직임은 쉼이 없다. 이날 실버 검도 수업에는 40여 명이 참여했다.

‘실버 무예’가 노인 건강을 지키는 스포츠로 떠오르고 있다. 죽도를 휘두르는 검도, 팔·다리를 힘차게 뻗는 태권도, 손과 다리를 크고 둥글게 움직이는 태극권이다. ‘노인이 힘든 운동을 견딜 수 있을까?’라는 건 오해다. 천천히 정확하게 기본 동작을 따라 하는 것만으로도 굳은 몸이 풀어지고, 전신 근육을 자극한다. ‘무예 정신’을 습득하며 따라오는 집중력·명상 효과는 덤이다.

태권도 동작 중 손 날로 상대방의 목을 공격하는 `제비 품목치기` 기술.

검도·태권도·태극권에는 공통 분모가 있다. 이들 실버 무예가 노인에게 좋은 이유를 보자.

첫째, 기본동작만으로 평소 잘 안 쓰는 근육까지 자극하는 ‘전신 운동’이란 점이다. 의사 검객 김한겸 교수(고대구로병원 병리학과)는 “검도는 평소 잘 안 쓰는 왼손·왼발을 비롯한 전신을 사용하는 대규모 근육 운동”이라고 말했다. 양손으로 300~500g의 죽도를 쥐고, 왼발에 체중을 실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검도의 기본 동작이다. 20여 년째 태극권에 심취한 최환석 교수(서울성모병원 가정의학과)는 “태극권의 기본자세 중 하나인 ‘마당’은 양 무릎을 45도가량 구부리고 엉거주춤 앉는 것인데 평소 잘 안 쓰는 허벅지 뒷근육까지 힘이 들어가 근력을 강화한다”고 말했다. 태권도는 두 팔·두 다리로 지르기·찌르기·막기 같은 기술을 사용하며 전신을 상하·전후·좌우로 움직인다. 물 흐르는 듯한 연결 동작은 근골격계의 유연성을 높여 준다. 최환석 교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춤을 추듯 부드럽게 움직이는 태극권의 자세는 그 자체로 전신 스트레칭”이라고 말했다.

굽은 자세 교정해 낙상 예방

근력을 강화하고 관절의 가동 범위를 개선하는 건 노인에게 낙상을 예방하는 효과로 나타난다. 미국 국립노화연구소가 1990년대부터 미국 전역 7개 센터에서 약 800명을 대상으로 낙상을 예방하기 위한 운동으로서 태극권의 효과를 연구했다. 최환석 교수는 “태극권의 재활 기능이 다른 비싼 재활훈련과 효과가 같고, 균형감각을 회복시켜 낙상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균형감각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이유는 맨발 운동이란 점이다. 김한겸 교수는 “맨발 운동은 바닥을 지지하는 근력을 강화해 신체를 통제하는 능력을 향상시킨다”며 “낙상 예방에 탁월하다”고 말했다.

둘째, 실버 무예는 노인의 자세와 동작을 교정한다. 노인은 근골격계가 위축돼 있다. 허리는 굽고, 상체의 회전운동은 떨어진다. 또 좌우가 불균형해 체중이 한쪽으로 쏠린 경우가 많다. 실버 무예 프로그램은 과격한 겨루기보다 노인의 자세를 바로 하는 데 일차적으로 초점을 맞춘다. 태권도·검도·태극권의 기본자세는 등·허리를 곧게 편 상태에서 맨발로 바닥을 단단히 딛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 일정 속도로 팔·허리·몸통을 회전하고 다리를 움직인다. 직립자세를 유지해 굽은 자세를 교정하고 하지 근력을 강화한다.

한림성심대 물리치료과 허진강 교수(한국태권도협회 의무분과위원장)는 “태권도는 몸의 중심을 잡는 심부근육을 강화하는 동작으로 신체 균형을잡는다”며 “심부근육이 약해 발생하는 요통·어깨 통증 같은 근골격계 질환을 예방한다”고 말했다.

절도 있는 동작으로 20여 가지 태권도 동작을 거뜬히 선보이는 이정현(여·67·인천 남동구)씨는 “태권도 덕에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씨는 12년 전 암벽을 타다 추락했다. 무릎이 손상되면서 후유증으로 퇴행성관절염이 왔다. 약을 먹었지만 통증 때문에 여전히 잘 걷지 못해 우울할 때 반신반의로 태권도를 시작했다. 이씨는 “태권도 3년 만에 검은 띠가 됐다”며 “약도 끊었고, 건강검진에서 신체나이도 60대 초반으로 나온다”고 말했다. 실제 ‘골관절염 환자를 위한 태권도운동프로그램의 효과’를 연구(2012, 조선대 의대·간호대)했더니 대조군보다 근력과 유연성, 민첩성은 증가했고, 통증·관절의 뻣뻣함은 감소했다. 50~79세의 관절염환자 27명을 대상으로 14개 기본동작을 주 2회, 한 시간씩 12주간 실시한 결과였다.

동작 외우고 집중력 높이는 정신스포츠

셋째, 실버 무예는 집중력·판단력을 강화하는 정신스포츠다. 검도에 입문한 김종석(73)씨는 “죽도를 잡았을 때 정신이 흐트러지면 다른 이가 다칠 수 있으므로 칼끝에 집중한다”며 “잡념이 사라져 마음 수련까지 할 수 있는 것이 묘미”라고 말했다. 김한겸 교수는 “검도는 눈이 빨라야 하고 상대방의 동작을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집중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호흡과 시선을 동작과 일치시켜 몸을 이완하는 것도 정신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검도가 끝나면 심호흡을 하며 명상을 한다. 몸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안정화시킨다. 태극권은 손·다리·골반·목·머리·어깨 각 부위를 충분히 이완한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자신의 신체를 바라보면서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한다. 최 교수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내 몸의 감각을 깨우는 것으로, 이완된 몸의 움직임에서 오는 전율이 있다”고 말했다.

다양한 동작을 익히는 건 인지력을 강화한다. 함수용(80) 할아버지는 “태권도의 여러 동작을 끊기지 않고 수행해야 하니 집에서도 누워만 있지 않고 틈나는 대로 연습을 해 순서를 기억한다”고 말했다. 실버 검도를 가르치는 김경석 사범은 “어르신들이 처음에는 할 수 있을까 망설이는데 수업에 참여하신 후에는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뿐 아니라 무예를 수련하는 자신의 몸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갖는다”고 말했다.

정확한 동작 천천히 반복해 부상 방지

실버 무예는 땀이 나는 중등도 운동이다. 그만큼 운동효과가 크지만 자칫 부상을 입을 수 있다. 김경석 사범은 “어르신의 부상 위험을 낮추는 건 속도조절”이라며 “갑작스럽게 멈추거나 급회전하는 동작을 무리하게 따라 하지 말고 천천히 기본동작의 강약을 조정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태극권은 작은 동작에서부터 시작해 서서히 큰 동작으로 관절 가동 범위를 높인다. 맨발로 운동을 하는 것이 좋지만 땀이 많거나 바닥이 차가워 발이 시리면 양말을 신고 미끄럼 방지 덧신을 신으면 된다.

실버 무예는 전신의 골격근을 충분히 사용하기 때문에 숨이 가빠지고 맥박이 빨리 뛸 수 있다. 명치가 찌릿하거나 아프면 운동을 멈추고 안정을 취한 다음 진료를 받아야 한다. 김한겸 교수는 “특히 심장 스텐트를 삽입한 심장질환자는 과격하게 따라하면 위험하다”며 “노인은 통증이 와도 잘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상 증상이 오면 즉시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민영 기자 lee.mi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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