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선물 받고 짜증 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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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느린 삶, '슬로 라이프(Slow Life)'의 저자로 유명한 쓰지 신이치 교수. 2005년 8월이 되어서야 그를 알게 됐고, 그를 만나게 됐고, 그를 읽게 됐으니 내 인생에 문제가 있다. 명함을 받아 들고 그 이름을 읽으니 기분이 묘했다. 당신 혹시 인생의 기로(?)에서 망설이다 드디어 믿을 만한 한 곳(信一.신이치)을 발견한 분 아니세요, 하고 묻고 싶었다. 그의 강연회에서 참으로 놀라운 우화를 들었다. 그 자신이 만든 우화이기가 쉽다. 짧다.

초원에 불이 났다. 짐승들은 일제히 도망쳤다. 그런데 벌새 한 마리가 겁도 없이 진화에 나섰다. 왜 벌새인가? 새 중에서도 가장 작다. 크기가 벌만 해서 벌새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벌새는 그 조그만 입으로 강물을 물고 와 초원을 태우는 불길 위에 끼얹었다. 밑도 끝도 없이 그 짓을 했다. 큰 짐승들, 가령 사자나 코끼리나 얼룩말 같은 짐승들이 벌새를 비웃었다.

"야, 그런다고 네가 불길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니?"그러자 벌새가 대답했다. "불길을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 그건 해보기 전에는 모르지. 나로서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

쓰지 교수 덕분에 나도 한 마리의 벌새가 된다.

우리 집 쓰레기통에서는 물에 풀어지는 종이류와 물에 풀어지지 않는 비닐은 엄격하게 분리된다. 종이류가 들어가야 할 쓰레기통에는 비닐이 한 조각도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소포 받을 때면 짜증스러워지곤 한다. 소포라면 선물이 대부분일 텐데, 선물 받고 짜증내는 사람도 있나? 내가 그렇다. 플라스틱 테이프가 흔해서 그럴 것이다. 소포가 테이프로 '똘똘' '탱탱' 감겨 있다. 어찌나 완벽하게 감겨 있는지 연장의 도움 없이 맨손으로는 풀 방법이 없다. 상상해 보시라. 한 중늙은이가 소포를 받았지만 맨손으로는 풀 수가 없어 돋보기를 찾고, 돋보기 쓴 뒤에야 칼이나 가위를 찾고, 그 다음에 테이프를 자르고서야 소포를 푸는 광경을. 소포 푼 뒤에는 종이와 비닐을 세밀하게 분리해 쓰레기통에 넣어야 한다. 그러자면 몇 분이 좋이 걸릴 때가 있다. 어떤 출판사에서 책 포장하면서 쓴 비닐 테이프의 길이를 일삼아 재어본 적이 있다. 놀라지 마시라. 7m였다. 그러니까 그 출판사는 나에게 책 다섯 권을 보내면서 단단하게 포장한답시고 무려 7m의 비닐 테이프를 쓴 것이다. 깨어지는 물건도 아닌 것을 그렇게 포장한 것이다.

나 하나 까다롭게 군다고 해서 비닐 테이프가 과포장에 남용되는 일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쓰지 신이치 교수의 우화를 좇아 한 마리의 벌새 노릇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몸피가 큰 동물들이 나서서 작은 벌새를 도와 초원의 불을 꺼준다면 좋겠지만, 난망이다. 그래서 벌새들에게 하소연한다.

이윤기 소설가.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