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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규연의 시시각각

수치에 숨어 있는 '악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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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규연
이규연 기자 중앙일보 탐사기획국장
이규연
논설위원

종종 ‘디테일’은 힘이다. 아주 세밀한 부분이 전체 틀을 바꾼다. 더구나 통계의 탈을 쓴 디테일은 막강한 힘을 갖는다. 숫자를 들이대면 목청이 큰 ‘상남자’라도 어린애가 될 만큼 그 권위는 대단하다. 그렇지만 통계는 불완전하고 오염되기 쉬운 존재이기도 하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고 했던가. 누군가 통계를 진실이라고 주장할 때 통계는 진실을 억누르는 악마로 돌변하기 십상이다.

 빌 게이츠는 매년 꼭 읽어야 할 책 목록을 여러 방식으로 소개해왔다. 올해에는 얼마 전 열린 ‘TED 콘퍼런스’ 강연에서 책 6권을 공개했다. 그중 하나가 미국 작가 대럴 허프가 1954년에 쓴 『How to lie with statistics』다. 국내에서는 『새빨간 거짓말, 통계』로 출간됐다. 책에는 기묘한 방식으로 통계를 조작하는 사례가 무수히 등장한다. 전쟁 당시 미국 해군이 신병모집에 쓴 수법이 대표적인 사례다. ‘해군 전사자 1000명당 9명, 뉴욕시민 사망자는 1000명당 16명.’ 얼핏 전쟁터가 뉴욕보다 안전하게 보일 수 있다. 모집단, 즉 ‘1000명당’에 치명적 함정이 있다. 병사의 모집단은 20대 청년이다. 반면 뉴욕시민에는 병약한 노인·어린이가 다수 포함돼 있다.

 마침 얼마 전에는 다국적 여론조사기관인 갤럽의 CEO가 ‘실업률 통계’를 맹비난했다. 백악관과 월가, 언론이 공모해 실업의 실상을 비틀고 있다는 주장이다. 예들 들어 한 주에 한두 시간 일하고 몇 십 달러를 받아도 실업 통계에서 빠진다는 것이다.

 진실성 논란은 먼 나라 일만도 아니다. 경남에서는 무상급식 여론조사 결과를 두고 논쟁이 한창이다. 한 여론조사기관이 ‘전면 무상급식 계속’이 34%, ‘선별적 무상급식’ 63%라는 수치를 내놓았다. 홍준표 경남도지사에게 유리한 결과다. 이에 야당이 반론을 제기했다. 여론조사 때 ‘정부지원을 늘려서라도 소득에 관계 없이 전면 무상급식을 하는 게 옳느냐’라고 물었는데 ‘지원을 늘려서’가 왜곡의 길라잡이였다는 비판이다. 실제로 한 진보매체 여론조사에서는 국민의 절반 이상이 ‘무상급식 중단 반대’ 의견을 보였다.

  불완전한 통계를 근거로 미래전략을 수립하는 것은 위험천만하다. 실증적인 사례가 ‘9호선’ 사태다. 서울지하철 9호선이 첫삽을 뜬 것은 2002년이었다. 착공 전인 2000년 민간업체가 수요예측 조사를 했다. 1일 이용객을 38만 명으로 봤다. 2004년 서울연구원 조사에는 31만 명이 나왔다. 그런데 개통을 4년 앞둔 2005년 정부출연기관인 한국교통연구원이 24만 명이라는 숫자를 내놓았다. 당시는 용인·김해 경전철 등이 수요예측을 잘못해 ‘텅 빈 전철’이라는 비난을 받던 시절이었다. ‘24만 명’에 따라 민간투자자가 ‘4량 전동차량’을 배치했다. 다른 노선이 8량, 10량인데 비해 터무니 없이 적었다. 실제 개통해보니 이용객은 38만 명이나 됐다.

 통계는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통계가 없는 진실은 공허하다. 그런 면에서 통계는 사회의 신뢰자본이다. 부실하거나 입맛에 맞게 만들어진 통계는 신뢰의 파괴자다. 미래를 뒤틀리게 보이게 하는 색안경이다. 정책이 실패했을 때 정책 집행자만큼이나 조사기관의 책임을 엄히 물어야 한다. 그래야 상대적으로 깨끗하고 신중한 통계가 나온다.

 ‘9호선’ 사태는 빌 게이츠가 나온 지 60년도 지난 책을 소개한 이유를 보여준다. 수치로 포장하면 진실이 되기 십상인 현대사회에서 세상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 적어도 세 가지 ‘감별 기준’은 있어야 하겠다.

 ① 통계 산출의 요소를 살펴라. 모집단·변수 등이다.

 ② 조사주체나 발주기관을 살펴라.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지 봐야 한다.

 ③ 통계만 믿고 미래전략을 짜지 마라. 직관·검증이 없으면 수치는 ‘악마’가 된다.

이규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