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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드 수익 났다하면 팔아치워 … 주가 상승 걸림돌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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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 최웅필(44) KB자산운용 밸류운용본부 상무는 주가가 오를 때마다 불안하다. 그는 국내 자산운용업계의 스타 펀드매니저다. 그가 운용하는 KB밸류포커스 펀드는 설정액이 1조4932억원에 달한다. 2010년엔 46.68%의 연간수익률로 국내주식형펀드 1위를 차지했다. 증시가 오르면 그가 운용하는 펀드 수익률도 오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그가 불안해하는 건 환매 때문이다. 2014년 2월 그의 펀드 설정액은 2조5648억원에 달했다. 그러나 그해 수익률이 높아지자 무려 9000억원 규모의 차익 실현 환매가 쏟아졌다.

 # 한 시중은행의 프라이빗뱅커(PB) 이모(39)씨는 동료 PB와 ‘펀드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PB들은 3년 동안 펀드매니저가 5차례 이상 바뀌었거나 뚜렷한 철학 없이 운용되는 펀드를 ‘걸레 펀드’로 부르며 기피한다. 얼마 전 고객 윤모(55·회사원)씨는 노후자금으로 매달 적립식으로 넣은 펀드의 손실이 크다며 상담을 요청했다. 이씨는 윤씨에게 즉시 환매하라고 조언했다. 이 펀드는 PB 사이에 이미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2년 전엔 스타 펀드매니저가 운용하면서 이름을 날렸지만 이 펀드매니저가 회사를 옮긴 뒤 연달아 손실을 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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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퇴(半退)시대’ 노후준비를 위해선 장기투자가 필수다. 그러나 국내 펀드시장엔 단기투자 관행이 뿌리깊게 박혀있다. 투자자는 1~2년만 지나 수익률이 오르면 서둘러 환매에 나선다. 펀드 판매자(은행·증권사 등)도 이를 부추긴다. 자산운용사는 한 펀드가 인기를 끌면 ‘시리즈’를 만들며 ‘자기 복제’를 한다. 한 펀드에 오랫동안 돈이 머물 수 없는 구조다. JP모간자산운용이 올해 1월 국내 펀드 투자자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펀드 투자기간이 3년 미만이라는 응답자가 43%에 달했다. 10년 이상이라는 응답자는 5%에 불과했다. 특히 환매 경험자는 펀드 가입 기간이 30개월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금융투자협회가 2006~2014년 한국·미국 양국의 주식형펀드 자금 유출입을 비교해보니 한국은 미국보다 주식형 펀드의 자금 유출입 변동폭이 최대 16배 컸다. 환매율은 월평균 4.0%로 미국(2.0%)의 2배 수준이었다. 개인 투자자가 이렇게 ‘투자 조급증’에 걸린 건 ‘손실의 기억’ 때문이다. 2008년 펀드 열풍이 불면서 공모펀드 규모는 227조원에 달했다. 그러나 미국발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사태가 터지자 80~90% 원금을 까먹은 국내 펀드도 속출했다. 여기다 판매자도 ‘펀드 갈아타기’를 고객에게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고객이 환매하고 새 금융상품에 가입해야 판매보수 등을 또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선 투자철학을 가지고 펀드를 운용하는 자산운용사를 찾아보기도 어렵다. 스타 펀드매니저일수록 높은 연봉을 좇아 이직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3월초 현재 금융투자협회에 등록된 펀드매니저는 53개사의 586명이다. 이들이 222조원(설정원본 기준)을 운용하고 있다. 그러나 평균 경력은 7년 11개월에 해당 회사에서 평균 근무한 연수는 5년 3개월밖에 안 된다. 은행원 평균 근속 연수가 15~20년인 것을 감안하면 이직이 일상화된 셈이다. 펀드매니저의 평균 근무 기간이 10년이 넘는 자산운용사는 한 곳도 없다. 서석기 증권분석사회 사무국장은 “회사는 단기 실적을 요구하고, 펀드매니저는 보수에만 집착하다 보니 이직이 잦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펀드시장이 이처럼 단기화하다 보니 증시가 오를 때마다 펀드 환매가 주가 상승의 발목을 잡는 일이 반복된다. 펀드 투자자가 환매를 요청하면 자산운용사는 돈을 돌려주기 위해 해당 주식을 팔 수밖에 없다. 최근 세계 각국이 금리를 내리며 돈을 풀자 국내 증시도 상승세를 탔다. 그러나 국내 주식형펀드(공모기준, ETF제외)에서는 16일~26일까지 9거래일 연속 돈이 빠져나갔다. 이 기간에 펀드 순유출 규모는 1조1063억원에 달했다.

 한국과 달리 주요 선진국에선 펀드 장기투자가 정착돼있다. 임병익 금투협 조사연구실장은 “한국 투자자와 달리 미국 투자자는 주가가 올라도 바로 환매하지 않고, 주가가 하락하면 오히려 펀드투자를 늘린다”고 말했다. 단기 수익에 집착하기보다 길게 보고 투자하되 정기적으로 건강검진 하듯 점검할 필요가 있다. 조재영 NH투자증권 강남센터 PB는 “펀드 투자자도 가입 후 그냥 내버려둘 게 아니라 환매 때까지 끊임없이 펀드를 관리해야 한다”며 “과거의 높은 수익률이나 스타 펀드매니저만 보고 가입하기보다는 매년 안정적으로 수익을 내는 펀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강병철·염지현 기자 bong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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