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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 속 15.4㎞ 운구 … F-16기 '실종자 대형' 애도 비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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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싱가포르 시민과 군인들이 29일 싱가포르 국립대 문화센터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리콴유 전 총리의 마지막 길에 조의를 표하고 있다. [블룸버그]

싱가포르의 국부(國父)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가 영면(永眠)에 들었다.

 29일 낮 12시(현지시간) 닷새간 안치됐던 국회의사당을 출발한 리 전 총리의 운구는 ‘군사강국’ 싱가포르의 육·해·공군과 경찰이 함께했다. 리 전 총리는 경제개발과 함께 자주 국방을 실현했다. 싱가포르는 예산의 25%인 126억 싱가포르달러(약 10조2000억원, 2014년)를 군사비에 투입하는 동아시아 5위의 군사대국이다. 고인의 유해는 육·해·공 3군과 경찰에서 선발된 각 8명으로 구성된 의장대가 운구를 맡았다. 싱가포르 국기에 덮인 고인의 관은 예포를 싣는 포병대 포차(운구차)에 실렸다. 연도에는 폭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만 명의 시민이 나와 꽃을 던지며 “리콴유”를 연호했다.

 리 전 총리의 운구는 고인이 1955년 4월 2일부터 60년간 최장기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무수한 연설을 한 옛 국회의사당을 지났다. 이어 운구 행렬이 65년 8월 9일 고인이 육성으로 독립을 선포했던 정부청사를 지날 무렵 육군 의장대는 21발의 예포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싱가포르에서 21발의 예포는 국경절에만 행하는 최고 수준의 의전이다. 세계적으로 21발 예포는 국기와 국가 원수에게만 행하는 존경의 표시다.

 예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싱가포르 공군 소속 F-16 전투기 4대로 구성된 ‘블랙 나이트’ 편대가 동에서 서로 저공비행하는 ‘실종자 대형’ 비행으로 건국 영웅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했다. ‘실종자 대형’은 3대의 전투기 위로 한 대가 빠르게 지나 날아오르며 산화한 조종사를 애도하는 공군의 전통 의식이다. 2012년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했던 미 해군 조종사 닐 암스트롱의 장례식에서도 ‘실종자 대형’ 비행이 펼쳐졌다.

 리 전 총리 운구가 에스플러네이드 다리에 접어들자 싱가포르 해역에 대기 중이던 해군 초계함 돈트리스함과 리질리언스함 두 척은 함기(艦旗) 신호로 고인의 이니셜 L.K.Y.를 만들어 애도를 표시했다.

 이웃한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전력을 과시한 리 전 총리의 운구는 이어 탄종파가의 싱가포르 주택개발청(HDB) 단지를 지났다. 싱가포르 주택개발청은 47년 영국 식민지 당시 영국 매체가 “세계 최악의 슬럼”이라고 묘사했던 싱가포르를 지금의 강소국으로 변신시킨 핵심 주역이다. “말이 아닌 행동하는 민주주의”를 실천했던 리 전 총리는 국민이 자신들의 집을 가져야 애국심을 갖게 된다고 믿었다. 주택개발청을 통해 강력한 주택 보급 정책을 펼친 이유다. 탄종파가는 리 전 총리의 지역구이기도 하다.

 운구는 다시 부패행위조사국(CPIB·Corrupt Practices Investigation Bureau)을 지났다. 부정부패 척결과 청렴한 사회 구현을 위해 설치한 총리실 직속 기구다. CPIB는 부패 용의자 및 가족의 체포와 수색, 증인 소환, 계좌 추적 등의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홍콩의 염정공서(廉政公署·ICAC)가 CPIB를 모델로 만들어졌다. 최근 강력한 반부패 정책을 펼치고 있는 중국도 싱가포르의 CPIB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리 전 총리의 정치 인생이 담긴 15.4㎞의 여정을 시속 25㎞로 지난 리 전 총리의 운구는 오후 1시48분 장례식장인 싱가포르 국립대 문화센터에 도착했다. 리 전 총리는 “싱가포르의 최대 재산은 인재”라고 굳게 믿고, 싱가포르 국립대와 싱가포르 이공대(폴리텍) 등 대학에 각별한 관심을 표시하며 인재 우선 정책을 펼쳤다.

 오후 5시15분쯤 장례를 마친 리 전 총리의 유해는 만다이 화장장으로 옮겨져 한 줌의 재로 돌아갔다. 그의 유골은 2010년 10월 2일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 콰걱추(柯玉芝) 여사의 유해와 합치됐다.

 지난 23일 92세로 서거한 리콴유 전 총리는 독립 당시 516달러에 불과했던 소득을 100배 늘린 싱가포르 경제의 건축가였다. 마키아벨리를 신봉해 독재와 세습을 이뤘다는 비판도 동시에 받았다.

 하지만 싱가포르 국민은 하나같이 국부의 영면을 슬퍼했다. 한 싱가포르 시민인 잉페이는 추모 사이트에 “50년 전 리콴유 전 총리는 싱가포르를 위해 울었다. 50년 뒤 온 국민이 그를 위해 울고 있다”며 추모했다. 간호사 탄옌리(26)는 “싱가포르 국민에게 그는 아버지 같은 존재다.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미래 세대에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지난 나흘간 이주민을 제외한 시민 334만 명의 12%에 해당하는 41만5000명이 국회의사당을 찾았으며 100만 명이 인근 추모시설을 찾아 리 전 총리를 조문했다고 밝혔다. 540만 국민 4명 중 1명 꼴이다.

신경진 기자 shin.kyung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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