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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치인 방일 후원 … 일본, 돈으로 '국화파' 키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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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미국 퍼스트레이디인 미셸 오바마(왼쪽)가 지난 20일 캐롤라인 케네디 주일 미국대사(가운데)와 함께 일본 교토의 유명 사찰 기요미스데라(淸水寺)를 찾아 일본 전통극 ‘노(能)’를 감상하고 있다. 일본은 다음달 말로 예정된 아베 신조 총리의 방미를 앞두고 일본을 찾은 미셸 여사를 국빈급으로 예우 했다. [교토 AP=뉴시스]

미국 조야를 향한 일본의 로비 총력전이 한국의 대미 외교를 위협하고 있다. 한국이 과거사 부정에 발끈해 사과 요구에 집중하는 사이 일본은 자금력과 인맥을 바탕으로 정계·학계 등을 뚫는 전방위 로비에 나서며 일본에 우호적인 미국 여론을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일본의 숙원 사업인 총리의 상·하원 합동 연설을 얻어낸 배경 역시 로비 외교를 통한 ‘국화파(지일파) 늘리기’가 주효했다는 분석이다.

 일본의 로비는 정치인 방일에 돈을 대는 것에서부터 대학에 연구비를 풀고 현직 로비업체를 고용하는 공식 로비에 이르기까지 총력전으로까지 이뤄지고 있다. 지난 2월 다이애나 드게트, 조셉 케네디 3세 등 여야 하원의원 10명이 일본을 방문했다. 방일 비용은 미 의회의 ‘의원연구모임’ 및 미국에서 일본 알리기에 앞장서온 사사카와(笹川)평화재단USA가 댔다. 이 재단의 이사장인 데니스 블레어 전 미국 국가안보국장은 대표적인 지일파다. 일본 방문에 참여한 미국 의회의 ‘일본연구모임(CSGJ)’에 따르면 방일 목적은 일본 내 정·관·재계 인사들과의 교류다. 한반도 문제도 논의 대상이었다. CSGJ는 “우리 연구 모임은 사사카와평화재단USA 등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웹사이트에 명시했다. 온라인 매체인 롤콜은 이 재단 등의 후원으로 지난해 2월 일본을 찾았던 드게트 의원에 대해 남편과 함께 도쿄·교토 등을 돌며 2만3687달러(약 2700만원)짜리 여행을 했다고 꼬집었다.

 일본 정부는 학계 뚫기를 공언했다. 지난 12일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매사추세츠공대(MIT), 조지타운대, 콜롬비아대 등에 각각 500만 달러(약 56억원)를 지원키로 했다. 일본학 연구 지원이 명목이지만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한국 등의 공세를 미국 현지에서 막기 위한 방파제 조성 작업이다. 통신은 “이번 지원은 아베 총리가 추진하는 과거사 편향 바로잡기와 같은 시점에 이뤄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아베 정부는 미국에서 역사 문제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데 대해 우려하고 있다”는 일본 재무성 관료의 주장도 함께 전했다.

 일본은 외교전쟁 현안을 놓고서는 자금력을 바탕으로 미국 현지의 로비스트를 고용해 대응한다. 지난해 한인단체의 주도로 버지니아주 의회가 동해병기법안을 처리하려 하자 주미일본대사관은 로비업체인 맥과이어 우즈 컨설팅과 계약을 체결했다. 미국 법무부의 외국로비공개법(FARA)에 따라 드러난 계약 관련 서류에는 “동해 병기가 왜 나쁜 정책인지에 대한 논점을 개발하고 관련 전문가를 물색하며 우리 입장에 우호적인 언론을 찾는다”는 목표가 명시됐다. 이를 위해 3개월간 7만5000달러(약 8400만원)를 지불하는 계약이었다. 워싱턴포스트는 당시 “주미일본대사관이 로비스트 4명을 고용했으며, 로비스트들은 (주 의회의) 위원회에서 일본해 표기는 국제수로기구의 표기 임을 주장했다”고 전했다.

 일본의 집요한 로비는 워싱턴에 ‘한국 피로증’을 은연 중에 확산시키고 있다. 지난해 8월 박진 전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장이 인터뷰를 했던 한 워싱턴 싱크탱크의 수장은 “도쿄에 갔더니 만나는 이들마다 한국 피로증을 거론해 깜짝 놀랐다”고 전했다. 한국 피로증은 한국이 사과를 수용하지 않고 과거사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해 피곤하다는 의미다. 이에 박 전 위원장은 “한국에선 일본 피로증이 심각하다”고 답했다.

 지금 워싱턴 조야에선 ‘일본 피로증’은 찾기 어렵고 일본발 ‘한국 피로증’이 공공연하게 등장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 1월 “일본이 2차대전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독일 모델로 간다 해도 중국이나 한국이 프랑스처럼 용서의 모델로 행동할지 아닐지가 문제”라고 주장하는 칼럼을 실었다.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무자비했다”고 주장한 데니스 블레어 전 국장 발언과 맥락이 유사하다. 유튜브에 “한국인 희생자 보상금으로 8억 달러를 줬다”는 일본 측 주장을 그대로 반복한 동영상을 올렸던 로버트 샤피로 전 미국 상무부 차관은 지난해 12월 포브스에 기고도 했다. 그는 “베트남은 과거를 제쳐놓고 한국과 관계 정상화에 합의했다”고 주장했다. 한국 피로증이 등장하는 배경은 아시아의 주도권을 유지해야 하는 미국과, 중국 대항마를 통해 위상을 확대하려는 아베 정부의 이해가 일치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한국 입장에선 미국을 설득하며 일본의 로비를 극복해야 하는 쉽지 않은 과제가 생겼다.

워싱턴=채병건 특파원 mfem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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