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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달러=환란의 추억'은 잊어도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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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강남규 기자 중앙일보 국제경제 선임기자
강남규
국제경제팀 차장

미국 달러가 강세다. 최근 6개월 새 약 20% 올랐다. 미국의 주요 무역 파트너들의 통화와 견줘서다. 이처럼 단기간에 달러 값이 뛴 경우는 드물었다. 1980년과 95년의 달러 강세가 지금과 비슷했을 뿐이다.

 그렇다 보니 음울한 추억이 되살아나고 있다. 바로 신흥국 ‘환란의 추억’이었다. 80년엔 남미 외채위기였다. 95년엔 멕시코 사태와 아시아 금융위기였다. 크레디트스위스(CS) 타오둥(陶冬) 중국 담당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힘을 얻은 달러는 억눌렸던 힘을 분출하는 거대한 공룡처럼 세계 경제의 지형 가운데 약한 곳들을 할퀴었다”고 말했다.

 한 가지 경험이 두 차례 이상 되풀이되면 법칙으로 인식되곤 한다. 요즘 국내외 전문가들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성명서 글귀 하나하나에 과거 어느 때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까닭이다. Fed가 기준금리를 인상할 뜻을 강하게 내비칠수록 달러 가치가 오르고, 그때마다 신흥국 환란의 추억이 더욱 또렷해진다.

 마침 이런 저런 조짐마저 나타나고 있다. 브라질·베네수엘라 등의 통화 값이 최근 추락했다. 국제 원유와 원자재 가격이 추락하면서 이들 나라의 경상수지가 나빠졌다. 주요국 국채 등 채권 가격의 강세도 불안감을 부채질하고 있다. 마틴 펠드스타인 하버드대 교수는 “채권 값이 너무 올라 있다. 역사적 평균치에서 너무 벗어났다. 미 기준금리 인상으로 상황이 급격히 바뀔 수 있다”고 경고했다.

 마치 80년과 95년처럼 지구촌 어느 한 곳에서 사달이 날 분위기다. 하지만 어떤 현상이 과거에 되풀이됐다고 법칙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 미국 통화 긴축이 곧 환란의 시작이 아닐 수 있다는 얘기다. 여전히 생생한 97년 환란의 추억 배후엔 미국 통화 긴축과 강한 달러 외에도 일본의 돈줄 죄기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미 Fed의 긴축에 동조해 시중 자금을 마구 흡수했다. 그 시절 일본은 미국과 더불어 양대 자본 공급원이었다. CS타오둥이 기자에게 말한 대로 “미국이 ‘글로벌 자본계’의 태양이었다면 일본은 목성쯤이었다.” 신흥국 환란이 발생하기 위해선 주요한 자금원의 동시 긴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미국 Fed와는 달리 유럽중앙은행(ECB)과 일본은행(BOJ)은 양적완화(QE)를 실시하고 있다. 유럽 회사채 금리가 연 2~3% 수준이다. “이런 역사상 초저금리 상황을 활용해 중국 등의 기업들이 유로화 표시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고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와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이 최근 전했다. 유로 자금이 달러 자금 대체재로 구실할 듯하다. 마침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사공일 본사 고문과의 대담에서 2017년까지 QE와 저금리 정책을 지속할 수 있음을 내비쳤다. 어느 정도 체력을 갖춰 시장에서 자금조달을 할 수 있는 신흥국이라면 97년처럼 강한 달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을 수도 있을 듯하다.

강남규 국제경제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