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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경험이 낳은 닮은꼴 예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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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호 14면

2010년 1월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조각 ‘걸어가는 남자’는 당시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인 1202억원에 낙찰됐다. 중앙포토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의 가장 큰 비극은 행복해지는 법을 아예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나는 행복해지는 재주가 없다”는 사무엘 베케트의 자조적인 말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베케트(1906~1989)와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의 시대는 그런 시대였다. 세계 대전을 연이어 겪은 죽음과 인간상실의 시대, 실존주의의 시대 그리고 부조리의 시대였다. 모든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계몽주의적 위로의 불빛이 닿지 못하는 깊은 심연을 끌어안고 살던 시대였다.

이진숙의 접속! 미술과 문학 <10>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vs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남자’

대표적인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로 196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베케트가 영광스러운 시상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세상의 궁극적인 무의미함을 드러내기 위한 훌륭한 퍼포먼스였다. 그러나 세상의 무의미를 드러낸 연극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은 뜨거웠다.

1952년 ‘고도를 기다리며’의 초연은 기대 이상의 성공에 힘입어 연장공연이 이어졌다. 지금도 전세계적으로 공연되고 있다. 아직도 고도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21일부터 산울림 소극장으로 다시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헛된 기다림만 용인되는 세상
무대 위에는 ‘고도(Godot)’를 기다리는 두 사내 고고(Gogo)와 디디(Didi)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고도(Godot)는 신(神)을 의미하는 영어의 ‘God’와 같은 뜻의 불어 ‘Dieu’의 합성어다. 불어와 영어에 모두 능통했던 베케트의 창안이다.

무대 위의 시간과 공간은 모두 모호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고고와 디디가 사는 세상은 어떤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부조리한 곳이라는 점이다. 또 다른 등장인물인 포조가 강변하는 것처럼 이곳은 불평등이 자명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세상이다.

이곳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유일한 행위는 기다리는 것이다. 고도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고도가 온다는 확신도 없이 오래된 고도의 약속에만 의지한 채. 이 기다림의 불확실성은 모든 것을 오염시키고 삶을 불행하게 만든다. 어떤 답도 얻지 못한 채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물어가고 그렇게 보낸 하루 하루가 이어져 50년이 되었다.

반세기를 기다렸건만,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고도는 오지 않고 다만 심부름꾼을 보낼 뿐이다. 디디는 고도의 심부름꾼에게 “나를 만났다고 말해라”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여기에 있다는 것, 자신의 미약한 존재가 잊혀지지 않고 증언되는 것만이 디디의 간절한 소망이다.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하겠다”는 쓸쓸한 말을 던지고 고고는 모든 불확실성 앞에서 나무에 목을 매려고 하나, 그조차 실패한다. 고고와 디디의 세계는 모든 의미 있는 기획은 실패하고 헛된 기다림만이 허용된 세계였다.

20년 지기 예술가, 베케트와 자코메티
1961년 파리 국립 오데옹 극장 공연 당시 조각가 자코메티가 무대 위의 나무 디자인을 맡았다. 자코메티가 만들어야 하는 나무는 목 매달아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고, 나뭇잎이 한두 개 달린 정체가 불분명한 나무다. 나뭇잎 없는 나무는 “선과 악을 알게 해주는 시든 나무”다. 삶의 황량함, 의미의 상실을 상징한다. 그 예술적 가치를 알고 있던 극장에 잘 보관되고 있다가 아이러니컬하게도 1968년 시위대들에 의해서 파괴됐다.

20년 지기 두 예술가는 무대 위 고고와 디디처럼 이게 어떤 나무여야 하는지에 관해 결론 없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베케트는 자신의 문학에 관해 “표현할 것이 없으며, 표현할 도구가 없으며, 표현할 소재가 없으며, 표현할 힘이 없으며,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없으며, 표현할 의미가 전혀 없는 표현”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어쩌면 실패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성공하는 방법은 실패 자체를 작품화하는 것이다.

자코메티의 작품 역시 실패의 경험에서 시작됐다. 24살의 젊은 자코메티는 어떤 인물을 외적으로 유사하게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러한 시도를 영원히 포기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색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오로지 인간만을 향하고 있다. 다만 다른 방식이 필요할 뿐이었다.

한때 초현실주의 조각으로 주목 받던 자코메티는 1936년 이후 10여 년간 기존의 작품 대부분을 파괴했다. 이 시기 자코메티의 작업과정은 마치 고도를 기다리는 것처럼 지루하고 기약이 없는 일이었다.

자코메티는 동생 디에고, 아내 아네트, 연인 이사벨과 캐롤린 등 몇몇 모델들을 앞에 두고 반복해서 작업을 했다. 동일한 대상을 반복해서 작업하는 것은 절망의 표현이다. 만약 한 인물의 본질을 모두 표현할 수 있었다면, 더 이상 동일 모델을 작업 대상으로 삼지 않을 것이다.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매일 인물의 두상을 붙잡고 씨름했지만, 결국 마음에 들지 않아 대부분을 파괴해버리는 일의 연속이었다.

마침내 10여 년 만에 그가 도달한 것은 5cm까지 축소된 아주 작은 인물상이었다. 덧없는 생명체의 허약함을 담아낸 듯 부서질 것 같았다. 작아짐으로써 인간은 한눈에 들어왔고 비로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존재감은 너무나 미약했다.

후에 자코메티의 인물들은 비루하고 미소하지만, 존재감이 있는 형상으로 진화해갔다. 길쭉한 인물들의 등장이다. 부동의 자세로 서 있는 여인과 걸어가는 남자상이 완성됐다. 인물들은 인간일 수 있는 최소의 조건만으로 존재하게 됐다. 자코메티는 고전 조각 인물상에서 기대할 수 있는 삶의 충만함과 풍요로움을 과감하게 제거해나갔다. 마침내 그가 드러낸 것은 인체의 골격이 아니라 삶의 지리멸렬함과 강퍅함, 구제할 길 없는 고독이었다.

고독을 영원한 것으로 만든 자코메티
자코메티에 대한 문인들의 사랑은 대단했다. 소설가 장 주네도 자코메티를 찬양했고, 사르트르는 1948년 전시의 서문을 써주었다. 사르트르는 자코메티의 작품을 “실존주의적 실체를 담은 예술, 즉 불확실하고 이해할 수 없는 우주 속 인간의 고독을 형태적으로 묘사하려는 노력”이라고 말했다.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를 쓸 때는 자코메티로부터 큰 영감을 얻었다.

그러나 자코메티는 자신의 작품이 베케트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영향으로 일방적으로 설명되는 것에는 저항했다. 조각에는 문학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이다.

“전세계에서 막연한 불안과 실존적 고민에 관해 마치 새로운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할 얘기가 많은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모든 시기의 모든 사람이 느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의 작품들을 읽으면 다 알 수 있는 일이다!”

자코메티는 저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자코메티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언급함으로써 불안과 고독의 역사를 사르트르보다, 베케트보다 더 깊이 끌고 들어간다. 인간은 원래부터 고독했는데, 이제 와서 웬 호들갑이냐면서.

그가 만들고 싶었던 것은 자신이 눈으로 보고 체감한 인간 본연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눈 앞에 보이는 현재의 모습이어야 할 뿐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표현하는 모습이어야 했다. 영원한 본질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고대 이집트 조각상을 참조했다.

자코메티의 남자는 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183m의 큰 키에 삐쩍 마른 남자의 단호한 걸음걸이. 팔을 양 몸쪽으로 붙이고 걷는 모습은 천년 넘게 부동의 자세에 갇혀있다가 비로소 한걸음을 떼었던 고대 이집트 조각을 닮았다. 자코메티의 남자는 부서질 것 같이 허약하게 진화했지만 큼직한 발만은 굳건히 땅에 붙이고 있다. 이집트 조각은 영원을 향했고, 자코메티의 조각은 고독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었다. 마치 인류가 직립보행을 시작한 순간부터 고독이 시작된 것처럼.

후대 사람들은 자코메티가 드러낸 심오한 고독에 후한 값을 치렀다. 2010년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남자’는 약 1200억의 경매가를 기록, 한 때 현대미술품 최고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 비범한 가격 앞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더 고독해졌다.

이진숙 문학과 미술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각 시대의 문화사 속 인간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있다. 『위대한 미술책』『미술의 빅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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