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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연금술사' 유재헌…싸이·서태지·빅뱅 콘서트 무대 만든 장본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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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무대 뒤에는 늘 숨은 주역이 있게 마련이다. 보이지 않지만, 무대가 완성되기까지 커튼 뒤에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 최근 출간된 책 『인비저블』은 이런 장인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는데, 유잠 스튜디오의 유재헌(41) 대표도 한 사례가 될만한 인물이다.

유 대표는 무대 디자이너다. 2000년 스튜디오를 차린 후 싸이ㆍ서태지ㆍ빅뱅ㆍ2NE1ㆍ김동률ㆍ아이유 등 국내 걸출한 가수들의 콘서트 무대를 만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무용극 배비장전(2014년), 뮤지컬 비밥(2009년~), 김연아 아이스쇼 ‘페스타 온 아이스(2010년)’ 등 장르를 넘나들며 각종 쇼의 놀이판을 만들고 있다. 서울 평창동 사무실에서 만난 유 대표는 “과거에는 한 사람이 전시ㆍ공연ㆍ연극 무대부터 건축까지 다 맡아서 했다. 규모가 커지면서 역할이 나뉘다 보디 요즘에는 영역을 넘나들며 무대 디자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오히려 필요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북한산 자락 바로 밑에 있는 사무실에는 유 대표가 전 세계에서 수집한 각종 조형물이 가득했다. 체코의 목각인형, 인도네시아 조각배 등. 그의 사무실에서 직업 정체성을 나타내는 물건은 두 개의 의자뿐이다. 표범머리가 붙은 의자와 화려한 철제 날개가 달린 의자인데 각각 이효리와 김준수 콘서트를 위해 만들었던 소품이다.

“일한다고 생각하면 영감이 안 생겨요. 그래서 노는 거랑 일하는 게 섞여 있어요. 우리 일은 익숙해지면 거기서 끝나버려요. 새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늘 백지 상태로 돌리는 이유에요.”

유 대표의 인생사는 치열했다. 집안에 음악가가 많았던 덕에 중학생 시절 밴드활동도 했지만 그는 집안의 이단아였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독립했고, 순수 미술로 방향을 틀었다.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 서서 밥 먹을 정도로 그림에 몰두했지만 화랑계에 회의를 느껴 그만뒀다고 한다. “예술 분야일수록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게 그의 예술 철학이다.

그런 다음의 선택지가 공연미술이었다. 오페라 제작사에 들어가 현장 노가다부터 시작했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디자인도 할 수 있게 됐고, 착실히 포토폴리오를 쌓아간 결과 지금에 이르렀다.

세계적 스타가 된 싸이는 2004년부터 그의 단골이다. 연말마다 열리는 콘서트 ‘올나잇스탠드’의 무대는 10년 넘게 유 대표의 손을 거쳐 만들어지고 있다. “기획사가 공연 내용을 외부로 오픈하는 걸 원치 않아해서…”라며 말을 아끼는 그가 그나마 조금 공개한 게 싸이의 공연 스토리다.
지난해 12월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싸이 콘서트의 무대 제작은 100일 전부터 준비했다고 한다. 공연 컨셉트를 잡고 무대 및 객석의 밑그림을 그리고 노래의 특징에 맞춘 소품 등을 손으로 스케치한 후 컴퓨터 작업을 통해 도면으로 완성한다. 디자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특수 연출 및 조명 장치, 바닥이 계단으로 변형하는 장치 등 각종 기술적인 부분도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3개월에 걸쳐 준비된 작업물은 현장에서 3~4일 만에 설치된다. 이후 3~4일간 24시간에 걸쳐 가수 리허설을 한 후 본 공연이 열린다.

기술 발달 덕분에 요즘은 글로벌 투어용 ‘휴대용 무대’ 제작도 가능해졌다. 어디서든 동일한 디자인의 무대를 구현하면서 이동하기 쉽게 제작하는 게 관건이다. 유 대표는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전세계를 돌며 열렸던 록밴드 U2의 360° 투어의 경우 첨단 음향 장치로 무장한 거미 모양의 무대가 유럽ㆍ북미ㆍ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의 스타디움에서 그대로 재현돼 화제가 됐다”고 말했다.

공연미술의 특성상 2~3시간의 공연 후 모든 작품은 대개 폐기된다. 창작자로써 허무하지 않을까. 유 대표가 답했다. “공연을 위해 태어났기 때문에 공연이 끝난 뒤 무대는 폐기되면서 완결성을 갖게 됩니다. 한 장소에 모여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던 관객들의 마음 속에 남아 활력소가 되는 것만으로 무대의 가치는 충분합니다.”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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