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가인(歌人) 송창식

중앙일보

입력

처음엔 밤 열 시라 했다. 그 다음 다행히도 시간을 앞당겼다. 그나마 당긴 시간이 밤 아홉 시다. 기인·외계인·천재로 불리는 가인(歌人) 송창식 선생이 통보한 인터뷰 시간이다.

긴박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인터뷰를 하지 않는 시간이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밤 아홉 시에 인터뷰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인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인터뷰 시간으로만 미루어 봐도 예사롭지 않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이른바 미사리 라이브카페 ‘쏭아(SSONGER)’. 아홉 시까지 그곳에 도착하려면 러시아워의 도심을 지나야 한다. 출발시간조차 가늠키 어렵다. 스마트 폰으로 교통정보를 탐색하고, 샛길까지 이용하며 겨우 약속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했다.

중앙일보 SATURDAY에 ‘사람풍경’을 연재하는 박정호 에디터와 함께 카페로 들어서니 미사리에선 이른 시간인지라 썰렁하다. 그런데 안내 프런트에서 송창식 선생이 식사 중이니 바깥에서 기다리라고 한다.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기다리는 시간에 주변 탐색을 할 여유가 생겼다. 이를테면 바깥에서 사진을 찍어야할 경우를 대비해 미리 장소 헌팅을 해둘 수 있게 된 셈이다. 기다림이 꼭 나쁠 이유는 없다.

십여 분 지나니 대기실로 들어오라는 통보가 왔다. 서너 명 앉으면 꽉 찰 크기의 대기실이다. 사진 찍을 공간이 나오지 않을 만큼 작다. 낭패감이 먼저 엄습한다. 내색도 못하고 한숨만 나오는데 원탁의 테이블에 앉은 송 선생이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로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인터뷰를 한다는 거요?” 정색한 표정이다.
“나한테 뭘 물어보고, 뭘 쓰겠다는 건지. 난 통 이해가 안되네.” 놀라서 대답도 못하는 상황에 또 일침을 쏜다.

“인터뷰란 게 결국 지 자랑만 하는 거구. 인터뷰 해보면 나두 별 수 없더라구.” 먼길 달려온 수고에 대한 인사는커녕 인터뷰를 탐탁지 않아 하는 속내를 보인다.

“나를 두어 달 쫓아다녀서 기사 못쓴 친구도 있어요. 난 심층취재를 하면 할수록 일반적인 말이 안 나오는 사람이요. 그러니 두어 달 쫓아다녀도 쓸 이야기가 없는 게지.”
분위기 심상찮다. 밤 아홉 시에 와서 말도 한마디 제대로 못했는데 돌아가란 얘기로 들린다.

아무 대답이 없는 박 에디터의 얼굴을 살폈다.
그냥 웃고 있다. 인터뷰 시작하기도 전에 쫓겨날 판인데 속내를 알 수 없는 웃음은 뭘까?

어색한 긴장감이 도는 잠깐의 미소와 침묵 뒤, 박 에디터가 비닐봉지를 내민다.
“선물입니다.”

포장도 하지 않는 채 선물이라며 내미는 비닐봉지 속 내용물의 정체는 뭘까?
“책입니다. 요즘도 화장실에서 책 읽으십니까?”

궁금증은 금방 풀렸지만 난데없이 책이다.
“사무실에서 눈에 띄는 대로 담아 왔습니다. 문학 책부터 심지어는 수학 책까지 있습니다. 아무 책이나 가리지 않고 다 읽는다고 들었습니다.”
수학 책이란 말에 귀가 의심스럽다.

그 순간 송선생의 표정이 돌변한다. 심드렁한 얼굴에서 하회탈로 변신이다. 바로 송창식표 하회탈 웃음이다.
“한번 잡으면 목차부터 주석까지 한자도 빠뜨리지 않고 읽죠.”

“요즘 읽는 책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책 이야기로 시작된 질문과 대답이 이어진다.

“왜 굳이 화장실에서 읽습니까?”
“혼자 마음대로 있을 수 있으니까요. 30대에 집을 장만하며 생긴 일과죠. 젊어선 꿈도 못 꿨죠. 독서도, 음악도 습관이죠.”

이렇게 얼레벌레 인터뷰는 시작되었다. 책을 매개로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진 셈이다.
이제야 다소 안도감이 든다. 두 거구의 사내가 좁디좁은 대기실에서 책을 주제로 실실거리며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밌다.

하지만 이제부터 사진이 문제다.

아직 무작정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다. 막무가내로 사진 찍다가 자칫 어렵사리 시작된 인터뷰를 망칠 수 있다. 긴장을 풀기는 이르다. 좀 더 눈치를 봐야 했다.

책 이야기에서 ‘쎄시봉’ 영화이야기로 이어지며 청년 시절의 노숙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정도면 사진을 찍어도 될 만큼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조명을 준비했다. 조명을 벽에 바짝 붙여도 적정 거리가 확보되지 않는다.
더구나 인터뷰에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망원렌즈의 초점거리가 애매한 여건이다.
최소 초점거리가 1m20cm다. 의자에 기대어 앉으면 딱 최소 초점거리, 앞으로 얼굴을 조금만 숙여도 초점거리가 안 된다.

해결방법은 와이드렌즈로 접근하는 수밖에 없다. 이 렌즈를 사용하면 두 거구의 인터뷰 공간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실 웬만큼 익숙한 관계가 아니면 피사체와의 심리적 거리가 필요하다.

사진엔 물리적 거리보다 심리적 거리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사실 코밑에서 사진을 찍어대면 누군들 맘이 편하겠는가. 카메라에 신경이 쓰여 인터뷰가 편치 않게 된다.

테스트 겸 조심스럽게 접근하여 셔터를 눌러봤다. 송 선생이 카메라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다행이다.

가까이서 보니 송 선생의 손놀림이 재미있다. 만나자마자 건넨 명함을 끊임없이 가지고 논다. 잠시도 손놀림을 쉬지 않는다. 게다가 원탁 테이블의 유리에 반영된 손모양의 이미지가 독특하고 재미있다. 다만 유리 밑에 깔린 꽃문양 식탁보가 반영이미지를 어지럽게 만드는 게 아쉽다. 유리를 들어 식탁보를 빼내야 했다.

웬만큼 인터뷰가 진행된 상황이고 심리적 거리도 어느 정도 해소된 것을 확인했으니 과감히 유리를 들어 식탁보를 빼냈다. 힐끔 보기만 할 뿐 아무 제지도 없다.

진짜 사진은 이제부터다. 심리적 거리, 시각적 방해물이 다 해소된 여건, 인터뷰의 막바지에야 사진 촬영 요건이 겨우 만들어졌다. 이제야 맘 놓고 촬영하나 했더니 박 에디터가 가슴 철렁해지는 질문을 한다.

“연세에 비해 젊어 보이시는데 머리 염색 안하신 거죠?”
순간 송선생의 안색을 살폈다. 그냥 씩 웃는다.
“이거 가발인데.”
“아이고 죄송합니다.”
“안 그래도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 가발 벗어버릴까 생각중이요. 거추장스러운데다 진짜 내 모습이 아닌 것 같아 어색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또다시 하회탈표정이다.
어렵사리 시작하여 가발이야기도 웃어넘길 만큼 훈훈한 분위기로 인터뷰는 마무리되었다.

인터뷰 후, 따로 사진 촬영하며 손에 대해 물었다. 인터뷰 내내 쉼없던 손놀림의 이유가 궁금했다.
“이젠 매일 연습한다고 해서 실력이 늘지는 않아요. 적어도 현상유지라도 하려면 매일 기타 치며 연습을 해야죠.”
손과 함께 포즈를 취해 달라고 했다.
잠시 투박한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손과 함께 포즈를 취하며 한마디 한다.
“한평생 이 손과 함께 해왔죠. 그래요. 이게 진짜 내 모습이죠.”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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