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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으로 소설 읽기] 모든 걸 감수하는 테스, 내향적 성격이 불행의 씨앗

중앙일보

입력

색칠 공부 테라피를 비롯한 각종 미술 치료가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색칠한다는 것은 마음속의 무언가를 간접적으로 표출하는 행위다. 아름다운 그림을 스스로 완성해 나간다는 기쁨과 자기만의 창조성을 표출한다는 뿌듯함이라는 작은 행복 속에 ‘어른들의 어린이 되기’라는 순수한 희열이 녹아 있다. 이것이 바로 생활 속의 카타르시스다. 예술적 표현 수단을 통해 꽉 막힌 감정을 풀어놓는 것이다.

칼 융은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에서 “잔류된 감정을 표현 모드로 바꿔놓는 수단을 발견해 내는 것이 치료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몸을 쓰는 행위다. 웃음을 터뜨리든 눈물을 흘리든 춤을 추든 그림을 그리든, 근육이 움직여야만 마음은 짓눌린 상처의 기억을 해방시킬 수 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표현 수단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치유의 시작이다. 슬프게도 그런 행운은 누구에게나 자주 찾아오지는 않는다.

특히 거대한 유리천장에 가로막혀 사회 참여는커녕 인간답게 사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전통 사회의 여인들에게는 ‘표현의 수단’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토머스 하디의 사랑스러운 주인공 테스가 바로 그런 비운의 여인이다. 중학생 시절 『테스』를 읽으며 나는 너무 강한 분노를 느꼈기에 20년 넘게 다시 펼쳐보지 못했다. 가난한 시골집 맏이로 태어나 무책임한 부모 밑에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았던 테스가 끝내 자신의 유일한 탈출구였던 사랑마저 포기해야 했던 이야기를, 어린 시절의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내향성’과 ‘외향성’에 관심을 가지던 도중, 나는 테스가 바로 전형적인 내향성 인격이라는 점을 떠올리게 됐다. 자신의 뛰어난 미모조차도 드러내기를 두려워하는 테스는 이미 스스로 갖고 있는 장점이나 재능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주인공이다.

자신의 바람을 표현 못하는 내향적 인격

20년 만에 다시 읽는 테스는 내게 새로운 심리학적 화두를 던져주었다. 내향적인 사람에게는 정말로 카타르시스의 기회가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것일까. 내성적인 사람은 안으로 분노를 삭이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일까.

내향성 인격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테스는 어린 시절부터 ‘자기 것’을 가지지 못했다. 모든 것을 동생들에게 양보했고, 알코올중독인 부모를 대신해 동생들을 돌보는 일을 마다지 않았다. 어여쁜 딸을 좋은 곳으로 시집보내 한몫 챙기려는 이기적인 부모의 희생양이 되는 것조차 감수하려 했다. 그녀가 탐욕스러운 알렉스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원치 않은 임신을 했을 때도 부모는 오히려 그녀를 비난한다. 왜 그 좋은 기회를 놓쳤느냐고. 왜 그 남자를 네 것으로 만들지 못했으냐고. 테스에게는 다정한 부모는 물론 이해심 깊은 친구조차도 없었다. 보수적인 시골 마을 사람들은 미혼모 테스를 돕기는커녕 더욱 고립무원의 상태로 몰아갔다.

테스의 내향성이 최악으로 치닫는 순간은 행복이 코앞에 있는 순간에도 자신의 행복을 움켜잡지 못할 때다. 마침내 자신에게 맞는 짝인 앤젤 클레어가 나타났을 때, 테스는 그에게 무한한 열정을 느끼면서도 그를 거부한다. 마치 처음부터 자신은 행복할 자격이 없다는 듯이. 그녀는 무언가를 원한다는 사실 자체에 죄책감을 느낀다. 하루 종일 소젖을 짜는 힘든 육체노동을 견디면서도 타고난 고결함을 숨기지 못하는 테스의 눈부신 영혼을 알아보는 것은 오직 앤젤뿐이었다.

앤젤은 테스의 미모와 육체만을 탐하는 다른 남자들과 달랐다. 앤젤은 테스가 청혼을 받아들일 때까지 그녀에게 키스조차 하지 않는다. 마침내 그녀가 청혼을 받아들였을 때 그들은 첫 키스를 나눈다. 이것이 그녀가 인생 최초로 느낀 카타르시스였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보낼 수 있는 순수한 열정의 키스를 통해 테스는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며 다시 태어난다. 앤젤은 겉으로는 지극히 내성적으로 보이는 테스가 실은 엄청난 열정을 숨기고 있음을 한눈에 알아본다. 초등학교를 간신히 마쳤지만 문학과 예술에 조예가 깊은 그녀의 눈부신 직관과 빛나는 감수성을, 앤젤은 간파했던 것이다.

자기 뜻 표현하는 게 최초의 카타르시스

앤젤은 내향적인 테스의 내면 깊숙이 잠자고 있는 삶에 대한 열정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앤젤은 테스의 뼈아픈 그림자까지 사랑하지는 못한다. 테스는 결혼 첫날밤 모든 것을 고백한다. 자신이 성폭행을 당했으며, 아기를 낳았고, 가엾은 아기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죽고 말았음을.

엄격한 목사 집안에서 자라난 앤젤은 자신이 굉장히 진보적인 사람이라 자부하고 있었으나, 첫날밤 신부의 용기어린 고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것은 ‘순결하고 정숙한 여인’이었으며 지금 자신에게 모든 것을 고백한 테스는 더 이상 ‘사랑했던 그 여인’이 아니라고 단정해 버린다. 그러나 앤젤의 무의식은 그런 의식의 단호한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클레어는 몽유병환자처럼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잠옷 바람의 테스를 안고 나가 그녀를 이름 모를 관 속에 눕히며 울부짖는다. “나의 신부가 죽었구나, 죽어버렸어!” “가엾은 나의 테스, 나의 사랑, 이토록 아름답고 착하고 진실한 나의 아내여!”

앤젤은 이성적으로는 테스를 거부하지만 무의식 속에서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테스는 그런 남편이 야속하지만 떠나는 그를 붙잡을 수가 없다. 그녀가 애원만 했다면, 적극적으로 한 번만이라도 “나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면, 앤젤은 결국 그녀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테스가 스스로 쟁취할 수 있는 최초의 카타르시스는 우선 소박하게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실패해도 좋다. 중요한 것은 표현한다는 사실 자체다. 노래를 부르고, 글을 쓰고, 수다를 떨고, 춤을 추는 모든 움직임은 결국 카타르시스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내 곁에 있어달라”는 그 한마디를 토해내지 못한 테스의 소심함과 앤젤의 편협함으로 인해 두 사람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집으로 돌아온 테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전보다 더 비참해진 가족들이다. 테스를 강제로 범했던 알렉스가 그녀의 가장 뼈아픈 콤플렉스였던 ‘동생들에 대한 연민’을 자극하여 또다시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리자, 테스는 더 이상 남편에 대한 일방적인 순정을 지킬 수 없게 된다.

테스에게는 한 번도 성공의 경험이 없었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을 기회가 없었다. 그녀에게 최초로 찾아온 구원의 열쇠가 바로 앤젤 클레어와의 사랑이었다. 테스는 자기비하와 자격지심의 두터운 베일을 힘겹게 벗어내고 처음으로 행복할 권리를 찾기 위해 분투했다. 그러나 그토록 사랑했던 앤젤은 ‘내가 그녀의 첫사랑이어야 한다’는 구시대적 고정관념을 깨지 못했다.

오늘날 테스처럼 곤경에 빠진 ‘내성적인 사람들’에게는 어떤 선택지가 있을까. 우리의 교육은 내향성을 부정하고 외향성을 키우는 쪽으로만 발달되어 있다. 내성적인 아이들의 성격을 ‘고쳐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어른들이 많다.

하지만 내향성은 사색과 관조를 통해 사물과 조용히 관계 맺는 능력이다. 내향성은 나만의 관점을 앞세우기보다는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들어줌으로써 타인을 위로할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내향성이 인간의 마음 안쪽으로 향하는 성찰의 길이라면, 외향성은 타인의 영혼으로 가닿으려는 표현의 방향성이다. 그 두 가지가 모두 자신의 길을 찾을 때 인간의 심리는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교사가 되고 싶었던 테스의 꿈을 응원해 줄 단 한 사람이라도 곁에 있었다면,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내향성을 긍정적인 쪽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정여울 문학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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