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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과 진화의 함수관계] 3. 동물의 性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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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많은 생물이 사람처럼 암.수가 나뉘어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아메바는 몸이 둘로 나눠져 번식을 한다. 또 암컷만 있어 자기 자신의 유전자를 그대로 복제해 새끼를 치는 '처녀생식' 생물들도 있다.

수십억년 전의 생명체는 대부분 처녀생식 비슷하게 번식했을 것으로 과학자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암.수 구분은 왜 생겼을까. 바로 기생충 때문이라는 이론이 최근 힘을 얻고 있다.

뉴질랜드에는 암컷만 있어 처녀생식도 하고, 때론 수컷이 생겨 양성생식도 하는, 몸길이 1㎝ 가량의 달팽이가 있다. 미국 인디애나대학의 커티스 라이블리(생물학) 교수는 어떤 환경에서 이 달팽이의 수컷이 생기는지 조사했다.

그는 결국 기생충이 많은 곳에 이 달팽이의 수컷도 많다는 것을 알아냈다. 스웨덴의 스테파니 시락 박사도 나이지리아의 달팽이를 연구해 마찬가지 결과를 얻었다.

이 달팽이는 여느 때와 달리 12월이 되면 수컷이 생겨나 암.수가 짝짓기를 한다. 이때 태어난 유충이 어른이 되는 것은 4, 5월께. 이 지방에서 기생충이 제일 극성을 부릴 때다. 그때에 대비해서만 양성생식을 하는 것이다.

기생충이 있을 때 양성생식이 유리한 이유는 유전자가 점점 다양해지기 때문이다. 돌연변이가 아니라면, 처녀생식으로 태어난 새끼는 어머니와 같은 유전자를 지닌다. 늘 같은 유전자여서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도 늘 같으므로 기생충이 적응하기 쉽다.

그러나 양성생식을 하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전자가 섞이면서 자손의 특징도 계속 바뀌어 기생충이 적응하기 힘들다. 결국 기생충에 희생되는 자손들도 그만큼 줄어든다.

이런 결과들을 놓고 과학자들은 암.수 구분의 출현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먼 옛날 자신과 똑같은 유전자를 복제하는 것들이 있었다. 다른 것과 유전자의 일부를 교환해 더욱 다양해지는 것들도 생겨났다. 기생충 때문에 결국 나중의 것들이 더 잘 살아남게 됐고, 이것이 생명체의 성(性) 구분을 낳았다."

기생충은 수컷을 택하는 암컷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기생충에 강한 수컷을 골라야 자손이 더 잘 살아남기 때문이다.

야생 암탉은 벼슬이 붉고 큰 수컷을 선호한다. 수컷이 이런 벼슬을 지니려면 '테스토스테론'이라는 호르몬을 많이 분비해야 한다. 이 호르몬은 기생충을 막아내는 몸속의 작용을 억제한다.

결국 붉고 큰 벼슬에서는 '테스토스테론을 많이 내도 될 만큼 기생충 걱정을 안하는 체질'이라는 게 나타나고, 암탉에게 호감을 준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수컷 공작의 꼬리가 화려할수록, 아프리카에 사는 '카탄고 레드핀'이라는 물고기는 호수 바닥에 모래로 더 큰 집을 지을수록 기생충에 강하고, 암컷도 잘 따른다는 연구가 있다.

왜 암컷만 기생충에 강한 수컷을 고르는 걸까. 암컷이 새끼를 만드는 데 수컷보다 훨씬 큰 투자를 하기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수컷은 매일 짝짓기를 해서 유전자를 퍼뜨릴 수 있지만 암컷은 한번 임신하면 출산 때까지 오랫동안 유전자를 퍼뜨릴 기회를 갖지 못하므로, 상대의 유전자를 고르는 데 수컷보다 훨씬 신중하다는 것이다.

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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