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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오스트리아 … 또 짐 싸는 44세 최향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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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최향남(44)은 또 짐을 꾸린다. 우리 나이로 마흔다섯 살. 이번엔 엉뚱하게도 오스트리아 야구에 도전키로 했다.

 오스트리아 세미프로팀 다이빙 덕스는 10일(한국시간) “한국 프로야구와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뛴 최향남을 영입했다. 그의 나이를 보고 기량을 판단하지 마라. 그는 오스트리아 야구에 많은 것을 선물할 것”이라고 밝혔다. 오스트리아 북동부에 위치한 소도시 비너 노이슈타트를 연고로 한 다이빙 덕스는 세미프로 1부리그 소속이다. 기량은 한국의 대학 팀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다이빙 덕스는 지난해 롯데 통역원으로 일했던 고교 선수 출신 하승준(32)씨가 총감독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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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향남은 여기서 또 던지기로 했다. 예전처럼 빠른 공을 던지지도 못하고, 한국보다도 훨씬 작은 무대이지만 그는 또 도전을 선택했다. 자신의 한계와 끊임 없이 싸웠던 그는 40대 중반의 나이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의 야구 인생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목포 영흥고 유망주였던 그는 동국대에 진학할 예정이었지만 행정 실수로 입학이 취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막노동판을 떠돌아다닌 그를 김응용 당시 해태 감독이 눈여겨 봤다. 1990년 최향남은 계약금 500만원을 받고 연습생으로 해태에 입단했다. 해태에서 2년을 보낸 최향남은 현역으로 군복무를 한 뒤 돌아왔다. 훈련 때는 잘 던지다가도 마운드에 올라가면 제구가 흔들려 ‘불펜 선동열’이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 1996시즌이 끝난 뒤 최향남은 LG로 트레이드됐다. 그는 LG에서 3년간 28승을 올리며 선발투수로 활약했다.

오스트리아 세미프로리그 다이빙 덕스가 제작한 최향남 환영파티 포스터. [사진 다이빙 덕스]

 2003년 LG는 어깨 부상을 입은 그를 방출했다. 그런데 어깨가 아파 빠른 공을 던지지 못하자 제구력이 좋아졌다. 모두가 야구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오히려 자신감을 가졌다. 최향남은 미국 애틀랜타와 대만 라뉴의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여기서 모두 실패해 멕시칸리그를 경험했다. 공이 좋아졌다는 소식을 듣고 KIA가 손을 내밀면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그는 여전히 ‘꿈의 무대’ 메이저리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이듬해 그는 KIA의 만류를 뿌리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에게 눈길을 주는 메이저리그 팀은 한 곳도 없었다. 결국 2005년 클리블랜드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했다. 연봉 10만 달러(약 1억1000만원). 이상훈(44)·구대성(46)에 이어 한국 프로야구를 거쳐 미국에 진출한 세 번째 선수가 됐다. 남들은 은퇴를 고민하는 서른네 살 때 일이었다. 그렇지만 빅리그 승격 기회는 오지 않았다. 나이가 많아 젊은 유망주들에게 밀린 것이다. “메이저리그에서 단 한 경기라도 뛰고 싶다”던 그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최향남은 2007년 롯데로 돌아왔다. 2008년엔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다. 롯데 팬들은 최향남을 ‘향운장’이라고 불렀다. 빠른 템포로 타자와 정면승부하는 그를 ‘술이 식기 전에 장수의 머리를 베어오겠다’고 한 삼국지의 장수 관우(관운장)에 빗댄 것이다.

 그는 2008년 11월 포스팅(경쟁입찰)을 통해 다시 미국에 도전했다. 세인트루이스가 제시한 이적료는 불과 101달러. 이번에도 그는 마이너리그에서 던지다 이듬해 5월 방출됐다. 일본 독립리그를 거친 최향남은 2012년 다시 KIA 유니폼을 입었다. 2013년 그는 세 번째 미국행을 타진했으나 또다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지난해에는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팀이 해체되면서 갈 곳을 잃었다. 최향남은 그래도 “이게 끝이 아니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행선지로 오스트리아를 택했다.  

김효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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