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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뽁뽁이 너머엔 파란 봄이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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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

지겹다. 겨울 내내 지지고 볶고 끓인 김장김치. 시뻘건 국물만 봐도 이젠 신물이 올라온다. 창에는 유리창이 제 노릇도 못하게 뽁뽁이를 잔뜩 붙여놓았다. 난방비 아낀다고 꼭 이렇게 해야 하나. 겨울 내내 그 나물에 그 채소. 그마저 눈 오면 시장도 못 간다. 대충 때운다고 애꿎은 김장김치만 들볶아 놓고선 이제 와서 김장김치를 타박하다니. 밖으로 나갔다. 봄은 ‘아직’이다.

그런데 어라, 새 소리가 어제와 다르다. 힘이 실려 있다. 깨작대던 숟가락을 내던지고 양평으로 갔다. 오늘 오일장 서는 날이다. 입구부터 북적북적, 이제야 내가 살아 있는 것 같다. 기름에 둥둥 떠다니는 도넛을 보고 있는데 주인아저씨가 갓 튀긴 도넛을 먹어보라 건넨다. 통도 크셔라. 백화점 시식코너에 가면 손톱만 하게 잘라놓고 먹어보라던데 이 아저씨는 한 개를 통째로 주신다.

오길 참 잘했다. 한 봉지 샀다. 커다란 솥에 담긴 구수한 멸치국물을 그릇에 연신 퍼담는 아주머니. 앉자마자 주문과 동시에 잔치국수 등장. ‘수저랑 김치 좀’ 했더니 옆에 앉은 손님이 챙겨 준다. 식탁마다 김치며 수저가 쌓여 있다. 여긴 다 셀프다. 김치도 함께? 일단 께름칙해서 김치를 덜어, 내 국수 그릇에 놓고 먹다가 나중엔 아예 같이 먹었다. 옛날에도 잔칫집 가면 한 상에서 낯선 이들과 함께 먹지 않았던가. 그릇을 말끔히 비우고 일어났다.

 손톱이 까맣게 더덕껍질을 까고 계시는 할머니에게 더덕·달래·원추리도 사고, 직접 키운 콩으로 띄웠다는 청국장도 샀다. 그때 코앞에 불쑥 무언가를 내미는 밑반찬 파는 아줌마. 내미는 반찬마다 조금씩 사다 보니 봉지봉지 가득하다.

 특별할 것도 없는데 맛있는 멸치국수. 빈대떡, 수수부침, 순댓국까지. 오일장에는 먹거리가 많다. 오일마다 잔치한다. 그곳에 가면 덤 많이 주는 달래 할머니도 있고, ‘통 큰 시식’ 도넛 아저씨도 있고, 예쁜 반찬가게 아줌마도 있고, 손톱 까만 할머니의 더덕도 있고, 아기같이 작은 체구를 가진 할머니의 청국장도 있다. 모든 게 살아 꿈틀댄다. 불경기에 더 팔겠다고 초조해하거나 안달하지 않고 다들 무심하다. 이런 ‘불경기도 때가 되면 다 지나가더라’는 비밀을 아는 게다.

 겨울을 겪어봐야 봄 귀한 걸 안다고 했다. 혹독한 겨울일수록 오는 봄이 더 귀할 게다.

 뽁뽁이 너머 보이는 바깥풍경이 단열을 위한 에어캡 때문인가 요지경 세상이다. 저 너머엔 희망찬 새 봄이 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저 뽁뽁이를 벗길 수 있으려나.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