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삶을 위하여|철학의 즐거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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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Ⅰ.사람들은 「철학」을 자주 입에 담는다. 하는일에 일관성이 없으면 철학이 없는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세상이 어수선하면 철학이 없는 시대라고도 말한다. 우리들은 철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철학이 어떻게 알려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있다. 밝은 햇볕이 따갑게 쏟아지는 이른 봄, 어느대학 캠퍼스의 잔디밭에 두학생이 한가롭게 앉아 정취를 즐기고 있다.
그 앞을 머리가 더부룩한 한 학생이 철늦게 두터운 외투를 걸친 채 고개를 가슴에 파묻고 주위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어디로인지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한 학생이 묻는다. 『저 친구는 누구지?』『아, 철학과 학생이야』『그래? 알았어』하며 절절 웃는다. 이 학생은 무엇을 알았으며 왜 웃은 것일까. 어쨌든 그는 철학을 자기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얕볼 수는 없는, 그러나 웃음이 터져나오는 학문정도로 알고 있는 것이다.

<장식뒤의 자화상>
우리는 흔히 철학을 깊은 학문 혹은 어려운 학문으로 알고 있다. 그것은 때때로 괴팍하기까지 하며 현실적으로는 별로 쓸모가 없는 학문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분명히 철학은 웃음을 자아내게하는, 말하자면 즐거운 학문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짓궂은 문외한을 단순히 즐겁게 해 줄 뿐만아니라 전문가들이 깊이 심취하면 할수록 더욱 즐거워지는 학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간혹 일상사에서 인생의 고뇌같은 것을 느끼고 세상의 부조리 같은 것을 경멸하게될 때 철학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철학은 이러한 것들과의 연관을 통해서만 이해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한발짝을 더 내디디면 어두운 부분들이 갑자기 밝은 빛에 노출되어 고뇌나 부조리와 씨름하는 철학이 어느새 즐거운 학문이 되어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보면 사람들이 경험하는 고뇌와 부조리는 오히려 유머러스해지기까지 한다. 세속적인 성공을 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고 명예와 권위와 권력을 자랑하는 사람들도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벌거벗은 임금님」정도로 비추인다는 것이다.
진정한 철학자들은 사람들의 겉치레를 보는 것이 아니라 화려하게 꾸며진 장식과 치장과 직함과 계급 뒤에 놓여 있는 본래의 모습을 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벌거벗은 채 뽐내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종류의 웃음을 웃는 것이 말하자면 철학의 즐거움인 것이다.
Ⅱ. 철학의 즐거움은 다른 종류의 즐거움과 어떻게 다른가? 우선 그것은 다른 즐거움과 비견될 수 없을 정도로 수준이 높은 즐거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관조의 즐거움』이라고도 하는데 인간의 영혼이 지니는 최고의 기능, 즉 이성을 구사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성은 인간의 신적인 부분이므로 그것은 신의 즐거움에 육박하는 지속적인 즐거움, 혹은 자족에 이르는 즐거움이기도 한 것이다.
둘째로 철학의 즐거움은 고통을 전혀 수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즐거움과 다르다. 대부분의 즐거움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
『관조의 즐거움』
예를들어 음주나 흡연뒤에는 두통이나 그밖의 질병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철학의 즐거움에는 어떤 종류의 괴로움도 수반되지 않는다. 쾌락주의자인「에피쿠로스」는 이것을 『수동적 쾌락』이라고 부르며 인간이 추구할 수있는 가장 바람직한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즐거움을 극대화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가르쳤던 그에게는 이러한 즐거움만이 심적 부동의 상태인 아타락시아(ataraxia) 의 경지에 들어갈 수있는 통로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끝으로 철학의 즐거움은 인간이면 반드시 누려야하는 즐거움이라는 점에서 다른 즐거움과 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공리주의자인「밀」(J·S·Mill)의 표현을 빌면 『바보로서 만족하기 보다는「소크라테스」로서 불만에 차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때 누리는 즐거움이다. 분명히 동물의 경우에는 즐거움의 양만이 문제가 될 것이다.

<이카루스의 비극>
그러나 우리가 인간인이상 무슨종류의 즐거움이든 많이 오래 지속되기만을 바라지는 않는다. 어느정도의 불만을 겅험하더라도 바보로서 만족한 상태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차라리 불만의 상태에서라도「소크라테스」의 철학적인 즐거움을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밀」의 입장인 것이다.
이처럼 철학의 즐거움이 다른 종류의 즐거움과 확연히 구분된다는 사실은 그것이 고뇌와 방황과 질곡을 딛고 일어선 후에야 비로소 얻어질 수 있는 즐거움임을 시사해준다.
그것은 「니체」의 표현처럼 『얼음과 준령속에서도 자유롭게 사는』즐거움이며 『언제나 비상한것을 체험하고 보고 듣고 의심하고 희망하며 꿈꾸는 사람』만의 즐거움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초로 만든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마구 돌진해 가는 「이카루스」의 비극적 즐거움이며 눈덮인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목숨을 바쳐도 좋은 산악인들의 비장한 즐거움이기도 하다. 쇼펜하워는 철학의 이『어려운』즐거움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철학을 배우는 것은 마치 높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험하고 가파른 바위 모퉁이를 휘돌아 나갈 때 갑자기 넓은 전망이 바로 발밑에 전개되곤 하는것을 볼 때면 위안을 받기도 하고 용기를 북돋우게 되기도 하지만 길은 갈수록 더욱 더 험준하게 되어 더 깊은 골짜기에이르게 된다. 그러나 마침내 정상에 오르게 되면 그곳에서야말로 진정으로 자유로운 전망이 주어진다.

<산넘어 산의 쾌락>
그러나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철학에는 정상이 없다. 철학자는 어느 산의 정상에 오르자마자 다른산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철학의 즐거움은 정상을 오르고 있다는 느낌속에 있으며 각고의 아픔과 슬픔을 이겨내는 과정에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당연히 받아들이는 현상이나 사실을 의심하는 즐거움, 즉 정상이라고 생각되는 지점을 떠나는 순간속에 진정한 철학의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공자가 말하는 『배우는 것마다 내것을 만들때』느끼는 즐거움(학이시습지, 부역열호)에 더 가까운 것이다.
Ⅲ. 철학의 즐거움을 관능적인 즐거움과 구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철학하는 마음을 갖게된다.
관능적인 즐거움의 추구는 인간이 갖는 본성의 일부로서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오늘날처럼 한 시대를 지배하는 풍조가 된 적도 드물다. 그 주요 원인으로서 우리는 자연과학의 급진적 발달을 들 수있는데 자연과학적 세계관과 인간관이 극도로 팽배하여 인간을 신의 방조물이나 도덕적 주체로 보지않고 다른 동물들처럼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않는 존재로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철학의 즐거움과 관능적 즐거움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된다.
물론 자연과학적 세계관이나 인간관이 필연적으로 우리를 관능적 쾌락주의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의 근원을 생물학적 사실에서 찾고 이것을 다시 심리학적 설명 방식으로 풀어보려 할때 철학의 즐거움도 결국은 관능적 쾌락의 일종이라는 결론에 이끌리기 쉬운 것이다.

<아직도 늦지않다>
더구나 자연과학의 급속한 발달은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정밀한 기계기술을 창출해내어 질적으로 수준이 낮은 찰나적 즐거움을 손쉽게 획득할 수 있도록 부채질한다. 현대인은 자이나교의 우화가 묘사하듯이 맹수에 쫓기다가 뱀들이 우글거리는 폐허가 된 우물에 떨어지던 중 요행히 나뭇가지에 매달려 목숨을 지탱하고 있으면서도 그 나무둥치를 갉고 있는 쥐들을 외면한 채 가지에 묻은 꿀을 핥고 있는 그 나그네의 꼴이 되어있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 우리가 추구할 즐거움의 전부인가.
그렇지 않다면 이제 부터라도 우리는 『반성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절규한 「소크라테스」에게로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할 것이다.
사실 철학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 즐거움을 서로 나누기에 우리의 마음은 너무 삭막해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늦었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철학적 자기 성찰에 『너무 늦었다』는 표현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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