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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시험·후지망」의 모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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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9일로 마감한 84학년도 전기대학 입학원서 접수창구의 마감시간 풍경은 시세판에따라 우왕좌왕하는 증권시장을 연상하게했다. 현행제도에 의해 네번째로 치른 올해 입시에서도 눈치작전이나 도박지원 풍토는 크게 개선 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있다. 빈 창구를 찾는 수험생들에게서 장래 희망이나 적성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합격자 점수로 서열화된 대학은 점점 설자리를 잃고있다. 내신과 학력고사는 4지선다형 일변도의 객관식 고사로 산출되고, 창의력이나 표현력등 고등정신 기능은 교육의 영역에서 밀려나 있다. 현행제도를 보완해야할 시점에 왔다는 소리가 높다.
84학년도 전기 대학입시가 9일 원서점수마감과 함께 끝났다. 어느창구에 원서를 냈느냐에 따라 합격과 불합격은 이미 결정됐다.
한장의 원서를 들고 조금이라도 덜 붐비는 창구를 찾아 수험생들이 방황하는것도 그때문이다. 올해 입시에서 수험생들의 이같은 눈치작전은 중상위권이 더욱 치열했다. 서울대와 연대·고대등이 마감시간 직전까지 절반이상의 학과에서 모집인원에 해당하는 원서를 받지못했고 중앙대·한양대등에서는 마감시간에 대부분의 원서가 몰려 곤욕을 치렀다.
한산한 창구와 지원자들의 점수가 자신의 점수보다 크게 높지않은 학과를 알아내기 위해 온 가족이 동원되기도 했고. 접수상황 게시판과 접수창구를 번갈아 오가는 수험생들로 마감창구는 초만원을 이루었다.
그틈을 비집고 엉뚱한 점수로 요행 합격을 노리는 도박지원도 많았다.
9일하오 마감30분을 남겨둔 서울대 접수창구. 검정고시출신의 김모군(20)은 하루종일 상황판을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다가 쏜살같이 접수창구 앞으로 다가갔다. 공대토목공학과 창구였다. 그자리에서 원서를 고쳐쓰려고했다. 지원자가 모집인원에 미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관계자가 이 광경을 보고 점수를 물어봤다. 김군의 학력고사점수는 2백18점. 그것도 인문계였다. 대학관계자가 『서울대는 동일계 가산점이 있어 불리하다』고 일러주자 김군은 그자리에서 부끄러운 듯 원서를 구겨 주머니에 넣고 말았다.
이같은 배짱지원이 마감창구는 물론 접수 첫날도 상당수 접수됐을것으로 대학관계자들은 보고있다. 그래서 현행입시가 「도박입시」로 불리기도 한다.
원서를 잘 내기만 하면 자기점수이상의 「영광」을 얻을수도 있고, 잘못하면 억울한 패배자가 될수도있다. 이미 알고있는 점수로 합격할 수있는 최고학과를 고르게 될때 모든 수험생은 경재자들이 어디로 쏠리는가에 신경을 쓰게된다.
마감일 마감시간까지 버티면서 최종시간에 지원자가 모집인원을 채우지 못한 창구 앞으로 몰려드는 수험생의 대열은 어쩔수가없다. 모든것을 결정해 놓고 원서를 내는것만으로 합격과 불합격을 판정하는 현행 선시험-후지원에서는 피할수없는 현상이기도하다.
이번 같으면 40여만명의 전기대 지원자중 30여만명이 마감당일 접수창구앞에 몰리는것도 거기에 원인이 있다.
합격만이 관심인 마감 창구앞의 수험생들은 적성진학이나 장래를 전망하는 희망학과 선택이 사치스러운 얘기로 들릴지도 모른다.
이대창구앞의 이모양(18)은 지방고교출신. 출신고교에서 작성한 한장의 원서를 들고 창구앞에 섰을때 그곳은 이미 모집인원을 넘는 지원자로 몰려 있었다. 안타까운 생각에 발을 동동구르다 창구 직원으로부터 개인인장으로도 지원학과 정정이 가능하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런데 합격이 가능할것으로 예상되는 한산한 창구는 수시로 변했다. 마감직전 그는 결국1대1 정도의 경쟁율을 보인 학과에 원서를 낼수 있었다. 꿈많은 소녀의 희망이나 적성이 관심일수가없는 상황에 몰린것이다.
현행제도는 그칠줄 모르는 눈치작전속에 대학이 스스로 교육해야할 학생을 선발할수 있는 기능을 전혀갖지 못한다. 거기에다 학력고사와 내신등급이 소수점 이하까지 정해진 수험생을 차례대로 뽑아야 하고 이에따라 대학간 또는 대학내학과간에는 명백한 서열이 정해져 무한한 가능성을 전제하는 교육의 영역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오히려 몇점짜리 학생이란 딱지는 학생이나 학교 모두의 교육적 노력을 저하시키는 요인이다. 잠재된 발전가능성을 앞세우지 않는 상태에서 교육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현행 선시험 후지원의 해독은 해마다 수십만명의 젊은이를 승복할수 없는 패배자로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시험에서나 탈락자는 있게 마련이지만 현행제도에서 탈락자의 대부분은 패배의 원인을 실력보다 지원 잘못으로 돌리지 않을수 없기 때문이다.
수험생들이 장래의 희망이나 적성에 따라 원서를 내고, 각각 다른 대학과 학과에서 나름대로의 실력을 겨루어 합격과 불합격을 판정받을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 전국에 99개의 대학이 있다고 하지만 입학시험은 단하나의 획일적 기준에 의해 치러진다.
대학의 교풍이나 전통은 이제 옛말이 되고있다. 한달에 몇십만원씩의 돈을 주고라도 높은 점수의 학생을 끌어들이면 「명문」이 되는것으로 통하고, 학생들 역시 점수를 이같은 돈의 보상으로 연결시키는 풍조까지 싹트고있다.
희망이나 적성보다는 합격에만 매달리는 눈치입시를 진지한 대학선택이 통하는 풍토로 바꾸기 위한 새로운 제도의 모색이 시급한 시점에 와 있다. <권순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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