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 정보 줄줄 새는데 … 금융보안원 설립 표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4면

지난해 초 신용카드 정보 유출 사고가 터지자 금융위원회엔 비상이 걸렸다. 사고가 난 지 한 달도 안된 지난해 2월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부랴부랴 대책을 내놨다. 금융결제원, 코스콤, 금융보안연구원에 흩어져 있는 보안 및 정책연구 기능을 떼어 내 ‘금융보안원’을 신설한다는 방안도 그 중의 하나였다. 이후 금융위는 일사천리로 기능 통합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애초 지난달 출범 예정이었던 금융보안원은 아직 설립을 위한 사원총회도 열지 못하고 있다. 설립 준비를 위해 파견됐던 각 기관 직원들도 이미 ‘친정’으로 돌아간 상태다.

 ‘한지붕 세 가족’의 갈등은 지난해 말 초대 원장을 선임하는 과정에서 빚어졌다. 원장 후보추천위원회는 공모를 거쳐 김영린 현 금융보안연구원 원장을 추천했다. 그러자 금융결제원과 코스콤에서 옮겨오기로 했던 직원들이 즉각 반발하며 이직 신청을 철회했다. 금융결제원 한 직원은 “조직원들의 화학적 결합을 위해선 초대 원장이 3개 기관 출신이 아닌 외부 출신 인사가 돼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는데 이를 무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진퇴양난의 상황이 이어졌지만 금융당국도 마땅한 해결방안을 내놓지 못했다. 결국 우스꽝스런 ‘절충안’이 나오고 있다. 3년인 원장의 임기를 확 줄이는 방식으로 갈등을 봉합하겠다는 것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조만간 김 원장이 타협안을 갖고 설득 작업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선 금융당국이 너무 서둘러 졸속으로 대책을 만든 탓에 벌어진 예고된 혼선이란 지적이 나온다. 이질적인 문화와 태생의 세 조직 출신 직원들을 한군데로 모으는 건 애초부터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욱이 이들 기관은 대표적인 ‘신의 직장’으로 꼽힌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금융결제원은 정부나 감독당국의 견제도 받지 않는데다 급여나 복지도 최고 수준”이라며 “그곳 직원들이 별다른 인센티브도 없는데 새 조직으로 옮겨가려 하겠느냐”고 말했다.

 설사 원장 선임 문제를 봉합하더라도 향후 기대했던 컨트롤타워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금융보안원은 회원사들의 회비로 운영되는 비영리 법인이다. 김승주 고려대(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법적 근거나 예산 지원 없이 금융회사들을 통제하고 조사하는 역할을 하기는 어렵다”며 “서둘러 만들다 보니 한마디로 기존 조직들의 기능을 떼고 붙여 놓은 데 불과한 조직이 됐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일만 터지면 서둘러 관련 조직부터 만들겠다고 나서는 보여주기식 행정이 빚은 대표적인 후유증이란 지적이 나온다.

 금융보안원의 전례 격인 금융보안연구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2005년 외환은행 인터넷뱅킹 해킹 사고가 터지자 금융부문의 보안전담기구가 필요하다며 2006년 설립한 기관이다. 그러나 잇따른 금융보안 사고에도 뚜렷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수장 자리에는 보안전문가 대신 ‘금피아’(금융감독원+마피아) 출신들이 잇따라 선임됐다. 역대 네명의 원장 중 정성순, 김광식, 김영린 원장 등 세 명이 금간원 간부 출신이다. 민간 출신으론 2대 곽창규 원장이 유일하지만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등 정치권을 거친 인사였다. 김 교수는 “명확한 설립 근거나 예산이 없으니 힘있는 수장을 통해 이를 보완하려 했고, 그 결과가 ‘낙하산’ 인사로 나타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민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