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앙 미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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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화가「호앙·미로」(Joan Miro)의 부음을 듣는다. 올해 90세. 입체파(cubism)최후의 거장이다. 「피카소」가 타계한 이후 입체파를 대표하던「미로」의 죽음은 입체파 제1세대의 종언을 뜻하기도 한다.
「미로」는 1893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다. 「모데스트·우르겔」에게 사사한후 26세때 파리로 옮겨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20연대는 미술사에서 중요한 시기다.
「피카소」와「브라크」에 의해 주도된 입체파가 전성기를 맞아 세계 미술계의 경이적인 조류를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조류에 최후로 참여한 사람이「샤갈」「클레」「미로」의 3인이었다.
파리화단에 데뷔하면서「미로」는『올리브 나무가 있는 풍경』(1919년), 『거울을 보는 나부』(1919년),『토끼와 정물』(1920년)등을 계속 내놓았다.
이때 재미있는 얘기는「미로」를 처음으로 인정해준 것이 「헤밍웨이」라는 점이다.
「헤밍웨이」는「미로」의 첫 작품을 사면서『점 하나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할줄 아는 금세기유일한 화가』라고 격찬했다. 당시로는 거금인 2백달러를 선뜻 내놓았다는 후문이다.
초현실파 화가의 공통점은 유머감각. 「미로」의 유머는「피카소」의 짖궂음에 비해 온화함올을지녔다고 평론가들은 말한다.
「앙드레·브레통」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그의 난해한 그림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전원에 들어선 소박미, 시를 보는듯한 느낌을 받게된다. 또 실제로 그는 태양, 달,별을 자주 그렸다. 이때의 대표작이『라 마시아』(1922년), 『네덜란드가의 실내』(1928년) 이다.
언젠가 그는『화가는 땅위에 설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곳에 서야 발을 통해 새로운 힘이솟구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의「덜 요란한」소박미는 이런 신조에서 나온것 같다.
회화로만 만족하지못한 그는 데생과 조각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데생은 초현실파와 처음 만나는 감상인의 눈에 비친 그대로 전형적인 국민학교·학생 그림이다. 주로 인물을 그렸는데, 영락없는 개구장이의 낙서다.
이같은 그의 소박미는 조각에서도 나타난다. 그의 조각은 평론가 「뒤팽」의 말을 빌면「유
머와모험」, 바로그것이다. 「뒤팽」이 최근 그의 작업실을 찾았을때 부러진 못, 녹슨 쇠붙이, 벽돌조각, 깨진 물병등이 널려 있었다. 쓰레기야말로「미로」가 좋아하는 소재였다.
그는 이 쓰레기들을 조합하는 과정에서「세부」와「통일」을 조화, 「사상」으로 회귀시켰던 것이다.
소박하면서 자유분방하게, 늙게까지 원기왕성하게 향리에 묻혀 일하던「미로」의 작품세계는 곧「자유」며「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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