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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토큰·회수권 쓰던 그 시절, 명절이면 차례음식 선물하던 손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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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진 기사는 35년 동안 매일 시민의 발이 돼 서울 시내를 달렸다. 이제는 운전대 앞이 집처럼 편하다.

흔히 버스를 ‘시민의 발’이라 부른다. 1980년대에 대중교통 수송분담률 1위를 지하철에 내줬지만 여전히 서울에서만 하루 평균 500만여 명 시민이 버스를 이용한다. 처음 운행되기 시작한 1920년대부터 100여 년 동안 시민의 가장 편하고 손쉬운 이동수단으로 이용돼 온 버스. 기술이 발달하고 우리 삶이 변함에 따라 버스의 모양은 물론, 차창 밖 풍경과 이용객도 변했다. 도선여객의 정정진(71) 버스기사는 35년 동안 운전대를 잡으며 이런 시대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꼈다.

‘버스 운전 35년’ 정정진 420번 기사

정정진 기사는 1944년 전라북도 부안에서 태어났다. 그런 그가 서울로 상경한 건 지독한 가난 때문이었다. 다섯 살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여덟 살 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여덟 살 위 큰 누나가 그를 돌봐줬지만 그조차 사정이 여의치 않자 정 기사는 작은집에 맡겨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작은 아버지는 서울로 가면 일자리가 많아 먹고 살 수 있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 그를 서울 먼 친척집으로 보냈다. 13세 되던 해였다. 낯선 서울이었지만 그는 곧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친척집 주인과 평소 안면이 있던 버스기사를 만난 거다.

버스 안내양 이전에 남자 조수가 있었다

1960년대 후반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에서 자동차 정비반장으로 일했다.

부안에서 덤프트럭만 몇 번 봤던 터라 처음 본 버스가 그렇게 신기하고 멋져 보일 수 없었다. 16세 소년의 가슴에 운전사에 대한 동경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는 곧바로 살던 집을 나와 운전사를 따라 다니며 손님을 태우고 차비를 받는 조수 일을 시작했다. 당시 버스는 ‘마이크로합승’이라고 부르는 현재의 봉고차만 한 작은 차였다. 그가 탄 차는 용산 원효로3가부터 종로구 숭인동까지 왕복하는 노선이었다. 새벽엔 기차를 타고 올라오는 사람들 태우러 기차역에도 갔다. 현재 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 근처엔 1971년까지 성동역이 있었다. 춘천을 오가는 기차가 이곳에서 출발했다.

 “시골에서 각종 농산물 팔고 하는 사람들이 다 거기서 내렸어요. 그 사람들 태우러 새벽엔 거길 갔죠. 그리고 출퇴근 시간이 되면 원래 노선대로 운행을 하고요.”

 새벽 4시부터 밤 12시까지 일을 하는 고된 날들이었지만 어깨너머로 운전과 차에 대한 기술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게 충격적인 사건을 만났다. 1960년에 일어난 4·19혁명이다.

 “손님을 태우고 종로로 가고 있었어요. 근데 을지로6가쯤 오니까 갑자기 학생 20여 명이 차 앞을 딱 가로막고 내리라는 거예요. 손님들하고 같이 다 내리니까 차를 몰고 가버리더라고요. 그렇게 차를 뺏기고 한동안 주변을 서성이는데 시위하던 학생들이 경찰이 쏜 총에 막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어요. 바로 내 옆에서도 사람이 픽픽 쓰러졌죠. 그렇게 피 흘리고 쓰러져 있는 학생을 다른 학생이 차를 몰고 와서 싣고 가더라고요. 우리 버스도 일주일 뒤에 수소문해서 왕십리쪽에서 찾았는데 차 안이 온통 피범벅이었어요.”

60년대 중반까진 한강에서 모래와 자갈을 실어 나르는 트럭 조수를 했다.

 그러나 조수는 길게 하지 못했다. 61년 버스 조수에 여자 차장, 즉 안내양제도가 도입됐기 때문이다. 그는 할 수 없이 공사장을 전전했다. 그러다 또 운 좋게 덤프트럭 조수 일을 잡았다. 당시 서울은 개발이 한창이었다. 수많은 덤프트럭이 한강에서 모래며 자갈을 실어 날랐다.

 “말죽거리로 한강 들어가서 모래 나르고, 제1한강교 중지도(현 한강대교 노들섬) 검문소 밑으로 들어가서 또 자갈 날랐죠. 그땐 서울시에 있는 주택 대부분이 다 그렇게 만들어졌어요.”

 험한 공사장 일을 돕는 조수라 힘들었지만 유독 겨울엔 더 일이 많았다. 엔진 열을 식혀 주는 냉각수에 넣을 부동액이 없던 시절. 하루 일과가 끝나는 저녁이면 그는 냉각수를 얼지 않게 다 뺐다가 아침에 다시 끓는 물을 부었다.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너무 추우면 엔진오일까지 다 얼어서 시동이 잘 안 걸리거든요. 그럼 아침에 휘발유를 깡통에 담아 불을 붙인 다음 트럭 밑으로 들어가서 그 불로 엔진 쪽을 데워 오일을 녹였어요. 하루는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바람이 확 부는 거예요.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서 깡통을 놓쳤죠. 그 불이 온 몸에 옮겨 붙었어요. 다행히 트럭 운전수가 빨리 불을 꺼줘서 살았죠. 그래도 크게 다쳐서 한 달간 병원에 입원해 있었죠.”

 그렇게 힘겹게 조수로 일하던 그는 22세에 마침내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드디어 꿈만 같던 운전사가 된 거다.

80년대 17번, 78-1번 버스가 황금 노선

80년대 서울 여객에 입사 후 처음 몰았던 17번 버스.

하지만 정 기사가 버스 운전대를 잡은 건 면허를 취득하고도 10여 년 뒤다. 그는 동산토건(현 두산건설) 사장 운전기사로 2년, 중동건설개발 바람을 타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5년을 보냈다.

 “사우디에서 운전기술자 겸 자동차 정비반장으로 일했거든요. 돈 많이 벌었죠. 70년대 초에 귀국해서 서울 독산동이랑 개포동 3단지에 집을 두 채나 샀어요.”

 많은 돈이 수중에 들어오자 사업을 결심했다. 서초동에 큰 한정식집을 차렸다가 1년도 안돼 접었다. 트럭으로 과일장사도 했지만 역시 손해만 봤다. 사업은 체질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 운전할 곳을 찾았다. 마침 개포동 집에서 가까운 대치동에 서울여객(현 도선여객)이라는 버스회사가 있던 걸 기억하곤 이력서를 들고 찾아갔다. 버스기사가 부족하던 시절이라 5일의 견습기간을 거쳐 바로 채용됐다. 80년 36세 나이에 그는 그렇게 어린 시절 선망의 대상이었던 버스기사가 됐다. 처음 운행한 버스는 대치동을 출발해 국립극장·청량리를 거쳐 신내동까지 가는 17번이었다. 그러다 78-1번으로 옮겼다. 이 버스는 대치동에서 가락시장을 들려 압구정동·말죽거리·원지동으로 가는 노선이었다.

 “이 두 개 노선이 황금노선이었어요. 사람이 엄청 많았죠. 78-1번은 가락시장을 돌아서 대치동 거쳐 압구정 가면 손님이 가득했어요. 선릉역에선 지하철 타려고 사람들이 많이 내리면, 또 다른 손님이 한가득 탔어요. 당시 회사 직원이 정류장에 대기하고 있다가 밖에서 사람들을 막 밀어 넣을 정도였죠. 그러다 신사동 가면 또 다 내리고, 다시 다른 손님들로 가득찼죠. 양재역 가면 또 가득 타고.”

 버스에 손님이 많은 만큼 버스기사에 대한 대우도 좋았다. 80년대 초 그가 받던 월급은 50만원 정도. 회사원 월급이 20만~30만원 정도였으니, 웬만한 회사 과장 정도 돼야 받을 수 있는 돈이었다.

 “그땐 일당제라서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씩 돈을 받았는데, 한 달치로는 그 정도 됐어요. 80년대엔 버스 운전하면 서로 사위 삼는다고 할 정도로 운전사에 대한 인식이 좋았죠.”

 그는 15년 전부터는 420번을 운행하고 있다. 개포동을 출발해 대치역·강남역·국립극장·청량리를 거쳐 전농동으로 가는 버스다. 매일 강남과 강북을 오가면서 서울시가 변하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봤다.

 “강북에선 청계천이 가장 크게 변했고 강남은 말도 못하게 변했죠. 내가 버스 회사에 막 입사했을 때 대치동엔 은마아파트, 신해창아파트 정도밖에 없었어요. 높은 건물은 5층짜리 상가 같은 건물 딱 하나 있었고 거의 다 공터였죠. 지금 가로수길이다 뭐다 난리인 신사동도 옛날엔 조용한 동네였죠.”

 승객도 변했다. 예전엔 남녀노소 모두가 버스를 이용했다. 하지만 최근엔 노인들이 버스를 많이 이용한다.

 “아무래도 소비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것 같아요. 요즘 젊은이들은 택시도 잘 타잖아요. 근데 노인들은 그저 버스에요. 택시는 돈 아끼려고 안 타고 지하철은 공짜라도 계단이 많아서 불편하고 복잡해서 안 타죠.”

간신히 매달려 “오라이” 외치던 안내양들

정 기사는 지금 사라진 추억의 버스 안 풍경도 뚜렷이 기억한다. 엔진이 버스 뒤쪽에 있는 리어엔진 형태가 보편화 된 80년대 중반 전까지 엔진은 운전석 옆에 있었다.

 “좌석이 모자라면 사람들이 거기도 비집고 앉았거든요. 겨울이나 비오는 날 습기가 차면 거기 앉은 손님들이 제 옆 창문에 서린 김을 닦아주기도 했어요.”

 70~80년대 버스를 떠올릴 때면 빠질 수 없는 모습이 또 있다. 20대 초 앳된 얼굴로 “오라이”를 외치던 안내양이다. 돈을 받는 임무 외에도 안내양들은 출퇴근 시간 ‘콩나무 시루’가 되는 버스에 사람들을 밀어 넣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렇게 사람이 많으면 노련한 운전수들은 노하우가 있었어요. 일부러 커브를 깊게 틀어서 사람들이 문 반대쪽으로 쏠리게 한 다음 문을 닫았죠. 지금 그러면 난폭운전이다 뭐다 항의가 들어오지만 그땐 그랬어요.”

 하지만 이런 노하우도 소용없을 만큼 사람이 많으면 안내양은 문 양 옆 손잡이를 잡고 달리는 버스에 간신히 매달린 채 일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위험천만이었죠. 실제로 그렇게 달리다 버스에서 떨어져서 죽는 안내양도 많았어요. 안내양들 참 고생 많이 했어요. 그 추운 겨울에 찬물로 차 다 닦고 청소하고. 하루 종일 신발 신고 있어서 무좀도 많이 걸렸어요.”

 그가 간직하고 있는 또 하나의 추억거리는 회수권과 토큰이다. 회수권은 학생들에게 할인 혜택을 주기 위해 70년부터 이용됐다. 당시 버스요금은 15원, 학생들은 10원짜리 회수권을 내고 탈 수 있었다. 77년에 도입된 토큰은 동전하고 비슷하지만 가운데 구멍이 뚫려있었다. 토큰은 승·하차 시간을 줄이고 현금을 다룰 때 생기는 위험 요소들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졌다.

 “회수권이나 토큰에 얽힌 추억도 많죠. 그걸로 요금을 속이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예를 들어 8~9명이 우르르 타면서 맨 뒤에 사람이 한꺼번에 토큰을 확 던져 넣어요. 그 때 사람 수보다 적게 내는 수법을 쓰는 거죠. 회수권도 몰래 반으로 찢어서 내기도 하고요.”

420번 버스를 타면 반갑게 인사하는 그를 만날 수 있다.

염화칼슘 없던 시절 모래주머니·삽 싣고 다녀

하루에도 수백 명을 태우고 달리는 버스 안은 사건 사고도 많다. 소매치기나 폭행 같은 드라마 속 상황이 실제로 펼쳐진다. 정 기사도 운행 중 소매치기가 발생해 정거장을 건너뛰고 바로 파출소로 버스를 몰고 간 적도 있다.

 “아쉽게도 지갑은 결국 못 찾았어요. 예전엔 쓰리꾼(소매치기)이 엄청 많았어요. 수법이 딱 정해져 있죠. 정거장에서 한 명이 문을 가로 막고 버스 노선과 전혀 엉뚱한 방향을 물어봐요. 뒤에 손님들 못 타게 시간을 끄는 거죠. 그럼 일당 중 한 명이 뒤에 서 있는 손님들의 가방을 뒤지는 거예요.”

모범운전자 표식 25년 동안 모범운전자로 선발돼 활동해 왔다. 모범운전자는 영업용 차를 운전하는 사람 중 5년 이상 무사고자에게 경찰청이 부여하는 칭호다.

 운전석을 보호하는 부스가 없던 때는 손님의 무자비한 폭행을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도 했다. 10여 년 전 신호대기로 정차하고 있을 때였다. 한 40대 남자가 문을 열어 달라고 했지만 정거장이 아니였기에 거절했다. 그러자 남자가 버스 앞을 가로막아 어쩔 수 없이 태웠는데 노선에서 벗어난 엉뚱한 곳으로 가자고 하더니 느닷없이 발길질에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한 승객이 경찰에 신고를 해 사건은 마무리됐다. 또 5년 전쯤에는 뱅뱅사거리에서 술에 취해 버스를 탄 청년이 “왜 내 집으로 안 가냐”며 운행 중에 막무가내로 때리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한참 달리고 있던 중에 때려 큰 사고가 날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날씨도 그를 괴롭히는 요인 중 하나다. 특히 눈이나 비가 와서 길이 얼어붙는 겨울은 기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계절이다. 그나마 제설작업이 신속히 이뤄지는 요즘은 운전하기 편하다고 한다.

 “80년대엔 염화칼슘이란 게 없었어요. 겨울이면 눈을 대비해서 각 버스가 모래주머니랑 삽을 필수로 가지고 다녔죠. 언젠가 눈이 엄청 왔는데, 오후 6시에 신내동에서 출발해 대치동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국립극장 고개를 넘어오니까 자가용들이 줄 서서 꼼짝 못 하고 있더라고요.”

 그를 비롯해서 여러 버스 기사와 안내양이 모래를 뿌리고 삽으로 눈을 치워서 자동차들을 빼주고 차고지에 들어왔더니 새벽 3시가 넘었다. 보통 저녁 8시면 들어왔는데 말이다. “눈이 많이 오면 배차시간이 촉박해서 밥도 못 먹고 일했어요. 빵하고 우유로 대충 때웠죠. 지금도 겨울이 제일 싫어요.”

“웃는 얼굴로 인사하면 잠시나마 힘 나겠죠”

버스운전 경력 35년. 직업 특성상 명절 휴일도 그에겐 그저 평범한 하루가 되는 경우가 많다. 운전대를 잡은 이후론 명절에 단 한 번도 쉰 적이 없다. 지난 설에도 3일을 꼬박 일했다. 가족과 시간을 못 보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런 날에도 손님들 발이 돼 줄 수 있다는 기쁨이 있다. 게다가 정이 넘치던 예전엔 손님들이 “고생한다”며 과일과 각종 차례음식으로 마음을 표현해 힘든 줄 몰랐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다보니 어느새 칠순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됐지만 정년퇴직을 하고도 15년째 계약직으로 운전대를 놓지 않고 있다.

 “내가 나이가 많아서 힘들지 않냐고 하는데, 지금은 운전하는 것도 아니에요. 운전사들 처우도 많이 좋아져서 지금은 반나절하고 쉬지만 옛날엔 이틀 운전하고 하루 쉬면서 일했어요. 게다가 지금 운전하는 버스는 장애인용 저상버스라서 오토매틱 기어거든요. 훨씬 편하죠.”

 하지만 많은 사람을 태우는 만큼 그는 운전기사로서 건강에 특별히 신경을 쓴다. 지금도 하루 한시간씩 계단 오르내리기를 하며 건강관리를 하고 있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아직 단 한 번도 아파서 쉰 적이 없을 정도로 건강하다.

 “사람이다 보니 차가 막히거나 막무가내인 손님을 상대하다보면 지치고 스트레스 받을 때도 있죠. 하지만 늘 즐겁게 일하려고 노력해요. 출근시간에는 하루의 시작을, 퇴근시간에는 고단한 하루의 마무리를 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거잖아요. 그런 손님들에게 웃는 얼굴로 인사하면 상대방도 잠시나마 힘이 나지 않겠어요.”

글=심영주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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