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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으로 치닫는 안락사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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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위크]네덜란드에선 조력 자살이 합법적이며 널리 행해진다… 다른 나라들도 곧 뒤따를 전망이다

2010년 네덜란드 정부청사 밖에서 벌어진 안락사 반대 시위. 비판자들은 네덜란드의 안락사 법이 한도를 넘었다고 말한다.

우리 가족이 외할머니와 함께 찍은 마지막 사진 중 하나를 보면 할머니는 마치 주먹다짐을 한 듯했다. 골절된 두개골과 피 묻은 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미국 조지아주의 한 요양원 병상에 누워 멍하게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때 할머니는 91세였다.

할머니가 자초한 사고였다. 2013년 6월 할머니는 휠체어에서 떨어져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간병인의 부축 없이 침대에서 나오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한 결과였다. 그 다음엔 골반이 골절됐다. 마지막 해엔 치매가 찾아왔다. 결국 장기요양원 직원들은 할머니 혼자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조지아주에선 그런 시설에서 환자를 꼼짝 못하게 하는 묶어 놓는 게 불법이다. 그래서 요양원 직원들은 병상을 바닥까지 낮추고 그 옆에 푹신한 패드를 대놓았다. 매트리스에서 벗어나면 자동으로 울리는 경보기까지 달았다. 그래도 할머니는 걸핏하면 경보기를 끄고 패드를 치우고 일어나 나왔다. 거의 마지막까지 할머니 몸은 너무도 허약했지만 의지는 너무나 강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네 달 전 어머니는 조지아주로 갔다. 요양원 간호사들은 할머니가 병상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려고 진정제를 계속 투여해 거의 식물인간처럼 만들어 놓았다.

어머니는 진정제 투여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할머니가 또다시 병상에서 일어나 걸으려다가 다치기 시작했다. 어느순간 할머니는 우리 이모 신디에게 이젠 이렇게는 그만 살고 싶다고 말했다. 세상을 하직할 준비가 됐다는 이야기였다.

멀리 떨어져 있던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할머니가 너무 오래 살진 않았는지 고민했다. 그러나 의사의 도움에 의한 자살(doctor-assisted suicide, 조력 자살이라고도 한다)은 조지아주에선 불법이었다. 할머니는 이제 정신마저 오락가락했다. 할머니가 회복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지난 1월 유럽 여행 중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절대로 우리 할머니처럼 되지 않겠다고 결심한 야니 빌렘센(65)을 만났다. 매우 건강해 보이는 그녀는 자신이 더 살고 싶지 않는 상황을 적은 종이를 보여줬다. 심하게 불구가 되거나 영구히 똑바로 걸을 수 없을 때, 혼자서 외출할 수 없을 때, 먹고 마시고 샤워하고 옷 입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야 할 때, 시각과 청각 장애가 극심하거나 치매에 걸렸을 때. 빌렘센은 “난 끝까지 스스로 걸어다니고 내 몸을 간수하고 싶다”고 말했다. “외출해서 친구를 만나거나 음악회나 극장에 갈 수 없는 건 내게 너무도 끔찍한 일이다.”

상냥하고 활달한 빌렘센은 생물학자로 일하다가 은퇴했다. 1997년 남편이 장암 진단을 받은 직후 그들은 존엄사 위임장에 서명했다. 두 사람 모두 자연스럽다고 느끼지 않을 정도로 오래 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언제 이 세상을 떠날지 스스로 결정하고 싶어했다.

죽을 자유를 달라

빌렘센의 남편은 2004년 사망했다. 암이 아니라 심장 문제 때문이었다. 남편은 오래 고통 받지 않아 “행운아”라고 빌렘센은 말했다. 두 번째 장종양 제거 수술을 받은 후 그의 심장이 멈췄다. 의사에게 남편을 회생시키지 말라고 설득하기 위해 존엄사 위임장을 보여줬다고 빌렘센은 들려줬다. “의사들은 ‘일단 남편을 살려 놓는 게 우리의 임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남편도 빌렘센도 원하지 않은 일이었다.

빌렘센이 원하는 건 앞에서 말한 상황이 닥칠 경우 의사의 도움을 받아 죽는 안락사다. 조력 자살이라는 이야기다. 그런 안락사가 현재 네덜란드에선 널리 행해지고 있다. 최신 자료에 따르면 2013년 네덜란드인 4829명이 의사의 도움으로 생을 끝내는 방법을 선택했다. 네덜란드인 사망 28건 당 1건 꼴이며, 2002년보다 세 배 증가했다.

네덜란드는 환자가 조력 자살을 선택하기 위해 말기질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입증을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의사 두 명만 설득할 수 있다면 안락사가 가능하다. 게다가 ‘견딜 수 없는’ 범위의 정의도 매년 확대되고 있다. 이제 네덜란드인은 루게릭병, 다발성경화증, 우울증, 외로움에 시달리며 지내는 데 지쳤다고 느끼면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다. 한마디로 삶에 지쳤다고 해도 죽음을 택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 행위는 엄밀히 따지면 네덜란드에서도 불법이다. 안락사에 도움을 준 사람은 4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 받을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초 이래 네덜란드 정부는 조력 자살을 대마초 사용자와 거의 똑같이 다루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인이라면 죽을 권리를 가져야 마땅하다는 대중의 지배적인 견해를 존중해 그냥 묵인하기로 한 것이다. 2002년부터는 정해진 기준에 부합한다면 안락사를 공식 처벌 대상에서 제외했다.

다른 나라들도 네덜란드의 모델에 서서히 다가가는 중이다. 지난 2월 6일 캐나다 대법원은 “안락사를 위법으로 규정한 현행법은 캐나다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며 대법관 9명 전원일치로 ‘안락사는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불치병으로 고통 받는 성인 환자가 안락사를 원하면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다만 의회에서 안락사를 허용하는 새 법률을 제정하는 절차를 거치는 기간을 감안해 1년 후부터 안락사를 허용하도록 했다. 그로써 캐나다도 룩셈부르크, 벨기에, 스위스와 함께 안락사가 완전히 합법인 서방 국가가 됐다.

스위스는 일찌감치 1942년부터 ‘조력 자살’을 허용했다. 환자가 생명 활동을 중지시키는 약을 투여하는 데 ‘참여할’ 경우에 한해서다. 다시 말해 그 약을 자신의 의지로 삼킨다는 의미다. 그 법은 환자가 스위스 국적이 아닐 경우에도 적용된다. 그래서 다른 여러 나라에서 환자들이 스위스로 ‘자살 관광’을 가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네덜란드는 이제 아기와 미성년자의 안락사도 허용한다. 다만 16세 이전에는 부모의 허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프랑스에서도 환자의 고통 없고 깊은 영구 수면을 유도할 수 있는 권리를 의사에게 부여하는 법안이 의회에서 심의 중이다. 영국의 경우 현재 의원들이 안락사를 최초로 합법화하는 ‘조력 사망법’을 검토하고 있다.

암스테르담에서 안락사 법의 확대를 위해 로비활동을 하는 단체 ‘죽을 권리(Right to Die)-네덜란드’의 홍보 책임자 피오네 존네벨트는 “10년이나 15년 안에 많은 서유럽 국가가 어떤 식으로든 안락사 법을 제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미국에선 ‘조력 자살’이 오랫동안 금기였다. 대부분은 ‘죽음의 의사(Dr. Death)’ 잭 케보키언의 악명 때문이다. 미시간주 의사였던 그는 안락사 운동가로 최소한 130명의 자살을 도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결국 2급 살인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8년 6개월간 복역한 뒤 가석방됐다(83세의 나이로 2011년 6월 3일 사망했다).

그동안 미국 사회는 안락사 시술행위를 놓고 팽팽한 찬반논쟁을 벌였지만 이제는 미국인이 생각을 고쳐먹고 있다. 조력 자살은 오리건·워싱턴·버몬트주에서 합법이며, 뉴멕시코와 몬태나주에선 의사가 환자의 생명활동을 중단시키는 약을 처방하는 행위가 허용된다.

지난해 캘리포니아주의 뇌암 말기 환자인 29세 브리터니 메이너드는 합법적으로 생을 마감하기 위해 오리건주로 이사했다. 신혼인 그녀는 신문 기고문과 TV 출연을 통해 자신의 안락사 선택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는 용감하다는 칭찬과 비겁하다는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지난해 11월 1일 메이너드가 사망한 이래 6개 주에서 의원들이 ‘죽을 권리’ 법을 발의했다. 다른 8개 주에서도 의원들이 그와 비슷한 법을 제정하겠다고 천명했다.

지난해 5월 실시된 갤럽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의사가 “고통 없는 수단을 통해 환자의 생명활동을 합법적으로 끝낼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미국인의 비율이 70%에 육박했다. 그 비율은 1950년 36%에서 점차 늘어나 1996년 이후 65~75% 사이를 오르내렸다.

안락사 지지자가 늘어나는 것은 요즘의 세계적인 추세를 반영한다. 무엇보다 개인의 자유에 더 많은 가치를 두는 나라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종교 지도자, 윤리학자, 장애인 지지자들은 그런 현상을 크게 우려한다. 그들은 의사를 통한 조력 자살이 고통은 줄여주겠지만 그 때문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한다. 이미 큰 어려움에 처한 고령자와 장애인이다.

네덜란드 캄펜 신학대학의 윤리학 교수 테오 보어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자율성을 아주 좋아한다. 그러나 연대, 인내, 최선의 노력 같은 다른 소중한 가치가 거기에 가려진 느낌이다. 지금 문제는 사람들이 고통을 견뎌낼 방법을 더는 찾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살은 자율성의 종말이다.”

2011년 어머니는 ‘공식적으로 말하고 싶다’는 제목의 이메일을 내게 보냈다. “내가 다른 사람 손에 죽는다면 그 누구에게도 나를 위해 복수해주기를 원치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도 자신이 죽을 때가 되면 그냥 얼음판 위에 내다 버리라고 내게 여러 번 말했다. 그들은 삶의 끈을 부여잡을 가치가 없을 때는 억지로 매달리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가 확실히 알아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자살에 관해선 두 사람의 견해가 달렸다. 아버지는 스스로 평화롭게 죽는 방법을 찾겠다는 생각이다. 어머니는 절대로 자살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어머니가 29세 때 외할아버지가 머리에 총을 쏴 자살했다. 파열된 식도 정맥을 치료하려면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그 수술을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건 아주 이기적인 행동이었어”라고 어머니는 눈물을 삼키며 내게 말했다.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 있어주고 돌봐줄 기회를 없애버렸어.”

죽음에 이르는 잘못된 방법

캐나다 대법원이 불치병에 걸린 성인에게 안락사를 허용한다고 결정한 직후 청원자 부부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또 그들을 기꺼이 죽음으로 안내해주려는 생각을 가진 의사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편안한 행위는 결코 아니다. 의사 대다수는 안락사를 의료의 윤리적 지침인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반하는 끔찍한 행위로 간주한다. 환자를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밀어 보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의사 베르트 카이저의 경우 그런 두려움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사라졌다. 그는 33년 동안 의사로 일하면서 환자 수십 명의 자살을 도왔다. 첫 몇 차례는 두려움 때문에 상당히 힘들었다고 그는 전화 인터뷰에서 말했다. 기소 때문이 아니라 되돌리기가 불가능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번하면 취소할 수 없는 일을 하는데 따르는 두려움이었다”고 카이저는 말했다.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불안과 고뇌가 잦아들었다. 카이저에겐 신경마취제 티오펜탈 나트륨의 치사량을 환자에게 주사한 다음 근육 이완제를 주사하는 행위가 갈수록 편안해졌다. 환자의 고통을 끝내준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에서 안락사 논란이 한창인 가운데 올랑드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말기환자 치료의 개혁안을 설명하고 있다.

카이저가 누군가의 자살을 도와주기로 동의할 때는 보통은 올바른 일이라는 생각이 확실하게 든다고 말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안락사를 도운 환자는 네덜란드에서 15년을 산 미국인이었다. 그는 78세로 뇌출혈로 고통 받고 있었다. 걷지도 못하고 말도 겨우 했다. 그로부터 1년 전 그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가 처음 카이저에게 안락사 도움을 청했을 때 카이저는 거부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 슬프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든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라고 카이저는 환자에게 말했다.

8개월 뒤 그 환자가 카이저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혼자 샤워도 못하고 대소변 실금 상태로 건강이 호전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2013년 여름 카이저는 마침내 그 환자의 자살을 돕기로 했다. 그게 올바른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환자의 자살에 도움을 주는 의사라면 후회하는 경우가 최소한 1건은 있는 듯하다. 카이저의 경우 폐암에 걸린 55세의 남자가 바로 그랬다. 그 환자는 이미 화학요법과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종양 전문의들이 “가능한 치료를 다했다”고 카이저는 말했다. “그런데도 그의 상태는 계속 악화됐다. 그는 의사들에게 화가 났다. 의사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환자는 25년 전 카이저에게 안락사 도움을 청했다. “삶에 대한 분노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나는 그의 소원대로 안락사에 도움을 줬다. 하지만 수 년 뒤 그게 옳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선택은 순전히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얼굴에 미소가 아니라 씁쓸한 표정을 띠면서 생을 마감했다. 인간이 그렇게 죽어선 안 된다.”

안락사의 전염성

프랑스에서 안락사 논란이 한창인 가운데 올랑드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말기환자 치료의 개혁안을 설명하고 있다.

네덜란드에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유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이 요즘 수백 명에 이른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죽을 권리-네덜란드’의 존네벨트를 찾아갔다. 그 단체는 회원의 존엄사 유언과 존엄사 위임장 작성도 돕는다.

이 단체의 회원수는 2010년 12만 명에서 지금 16만 명으로 늘었다. 신규 회원 가입자가 매일 평균 30~50명이나 된다. 회원은 연회비 17유로(약 2만1000원)를 내고 생을 마감하는 문제와 관련된 상담을 받고 서류 작성에 도움을 얻는다. 지난해는 잉여 수입으로 이동 진료소도 개설했다. 의사-간호사로 이뤄진 23개 팀이 안락사를 위해 회원 자택을 방문할 준비를 갖추고 대기한다.

네덜란드가 2002년 안락사 법을 제정한 후 첫 몇 년 동안은 안락사 건수가 줄었다. 그러다가 2007년부터 연간 15%씩 증가하기 시작했다. 카이저는 “사실 그런 증가를 예상하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카이저를 비롯한 네덜란드의 안락사 도우미 의사들이 윤리적인 진퇴양난에 처했다.

카이저는 조력 자살의 꾸준한 증가가 네덜란드인의 자율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그 법을 지지한다고 말한 네덜란드인이 90%가 넘었다(물론 그런 식의 죽음을 택하겠다는 비율은 20%에 불과했다). 하지만 네덜란드에선 수십 년 동안 안락사가 암묵적으로 허용됐다. 그러니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보어 교수는 안락사 증가에는 선전의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네덜란드의 기자 게르베르트 반 뢰넨이 지난 10년 동안 안락사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다큐멘터리 여러 편을 조사했다. “그 다큐멘터리는 특정 문제를 제기하지만 가장 중요한 의문은 완전히 무시했다”고 보어 교수가 말했다. “그래서 일반인은 안락사가 아주 좋고 아무런 위험도 없다고 세뇌당하는 셈이다. 그런 게 전염성이 강하다.”

다른 요인도 있다. 네덜란드의 경우 안락사 허용 조건을 충족시키기가 갈수록 쉬워진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 대다수가 말기질병 환자였다. 지금은 사람들이 우울증, 자폐증, 시력 상실, 또는 심지어 다른 사람의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는 처지까지도 견뎌내고 싶지 않다면 의사가 그들의 죽음을 도와줄 수 있다. “이중 안락사가 늘어난다”고 보어 교수가 말했다. “배우자 한 명이 말기환자이고 다른 한 명이 배우자의 보살핌에 의존하는 경우 그들은 혼자 살아남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가 검토한 안락사 500건에서 10%는 ‘외로움’에 관한 언급이 포함돼 있다고 보어 교수는 말했다. “우리가 갈수록 우려하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통계 수치가 보어 교수의 말을 뒷받침한다. 우울증에서 정신분열증까지 다양한 정신 질환을 견딜 수 없다고 의사를 설득해 안락사를 받은 네덜란드인 환자가 2012년엔 13명, 2013년에는 44명으로 증가했다. 안락사를 택한 치매 환자도 2012년 43명에서 2013년 97명으로 늘었다. 보어 교수는 “두렵다”고 했다. “네덜란드의 상황이 제어 불능 상태에 빠졌다.”

조력 자살은 가장 저렴한 대책

안락사 법을 발의한 콜로라도주 하원의원 조앤 지날이 남편의 죽음과 관련한 의회 청문회를 마친 뒤 지인과 포옹하고 있다.

2005년 네덜란드 의회는 또 다른 형태의 안락사를 합법화했다. 아기의 안락사다. 근년 들어 신생아 안락사 건수가 줄었다. 부모들이 더 빨리 손쓰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출산 전 검사의 새 시스템을 도입했다. 임신 20주 안에 초음파 검사로 태아의 선천성 기형이 심하다고 판단될 경우 낙태를 허용하는 제도다.

네덜란드는 미성년자의 안락사도 허용한다. 12~15세도 부모가 허락하면 죽음을 요구할 수 있다. 16세가 넘으면 ‘부모의 관여’만으로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다.

소아과 의사 에두아르트 베르하겐은 네덜란드의 소아 안락사 지침 작성에 참여했다. 그는 법이 좀 더 포괄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한계선이 12세라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지만 안락사가 허용되지 않는 11세짜리도 있을 수 있다.”

미국의 소아과 의사가 그런 주장을 한다고 상상하긴 어렵다. 그러나 지난 13년 동안 네덜란드의 안락사가 그처럼 증가할 줄은 아무도 몰랐듯이 어쩌면 미국도 머잖아 그렇게 될지 모른다.

섬뜩한 사례도 많다. 스위스의 한 의사는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정신분열증을 앓는 프랑스인 쌍둥이의 자살을 도왔다는 혐의다. 벨기에(2013년 조력 자살이 27% 증가해 1816건을 기록했다)에선 한 남자가 부모의 ‘이중 안락사’를 주선했다.

현재 프랑스에서 안락사 논쟁이 불붙은 것은 2013년 발생한 두 사건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해 80대 부부의 이중 안락사가 두 건이나 발생했다. 한 부부는 파리의 고급 호텔에서 룸서비스를 주문한 뒤 각자 자신의 머리에 비닐 봉투를 뒤집어쓰고 질식사했다. 곁에는 ‘존엄사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라고 쓴 메모지가 놓여 있었다. 다른 한 부부는 84세 남편이 병상에 누워 있는 말기환자인 아내에게 총을 쏘아 숨지게 한 뒤 총구를 자신에게 돌렸다.

반대론자들은 안락사를 결심한 몇몇 개인의 관점에서만 이 문제를 고찰하는 것이 상당히 위험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의사에게 환자의 자살을 도울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은 리스크가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캘리포니아주의 변호사로 국제 안락사·조력 자살 전담반(International Task Force on Euthanasia and Assisted Suicide)의 컨설턴트인 웨슬리 J 스미스에 따르면 사람들이 고통의 의미를 잊어버리는 것이 가장 큰 리스크다. “고통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최악의 경험이라는 새로운 관점이 생겨났다”고 스미스는 전화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래서 고통을 아예 없애는 것이 사회의 역할로 간주된다. 고통을 완화해준다는 것과 아주 다른 개념이다.”

돈 문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야 마땅한 이 논쟁에 경제적 고려 사항도 끼어들 수 있다. 여러 선진국이 그렇듯이 네덜란드에서도 향후 20년 안에 고령자가 30~40% 늘 것으로 예상된다. 비판자들은 안락사가 위험한 대안으로 대두된다고 말한다. 사회가 고령자를 더 빨리 죽음으로 조금씩 밀어내는 방법이라는 뜻이다.

미국의 안락사 반대자들은 수익에 초점을 맞춘 의료 시스템과 비용절감을 우선시하는 관리의료 업체들의 점진적인 의료 시스템 장악이 중대한 윤리적 리스크를 제기한다고 주장한다. 안락사 합법화에 반대하는 장애인 권익옹호 단체 ‘아직 죽지 않았다(Not Dead Yet)’의 다이앤 콜먼 대표는 “미국의 의료 시스템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한다. 조력 자살은 의료 시스템이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저렴한 대책이다. 그런 점이 심히 우려된다.”

2008년 미국 오리건주에 사는 저소득층 부부 바버라 와그너와 랜디 스트룹은 각각 폐암과 전립선암에 걸려 치료를 받으려 했다. 그러나 저소득층의 의료비를 부담해야 하는 주 정부는 그들이 원하는 비싼 치료를 거부하고 몇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대안 목록에는 조력 자살 비용을 대주겠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그들 부부가 그 내용을 공개하자 결국 주 정부가 방침을 바꿨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주의 변호사 스미스는 사회가 안락사를 더 널리 수용할수록 정부는 가장 허약한 주민의 치료비를 지불하지 않으려고 더 안간힘을 쓴다고 주장했다.

조력 자살의 경우 죽음의 책임소재 규명도 큰 문제라고 비판자들은 지적한다. 네덜란드에선 의사가 그런 죽음의 사인을 검시관에게 반드시 통보해야 한다. 그 다음 의사, 변호사, 윤리학자로 구성된 지역 안락사 심의 위원회가 해당 건을 검토한다. 그러나 그런 심의는 환자 사후에 이뤄지기 때문에 의사의 범죄 혐의 유무를 확인하는 것에 국한된다. 2002년 이래 심의 위원회가 불법으로 간주한 안락사는 연간 약 5건이었다. 그러나 기소된 의사는 한 명도 없었다.

네덜란드의 사례를 비춰볼 때 조력 자살을 합법화하려면 취약한 사람이 죽음을 선택하도록 강요받을 리스크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자들은 말한다. 의료 시스템, 자신의 죄책감, 또는 가족이나 간병인의 학대가 그 리스크의 동인이다. 콜먼 대표는 “안전장치를 겹겹이 마련한다고 해도 충분치 않다”고 말했다. “우리는 죽음을 원하는 사람에게 ‘그건 안 된다. 어떻게 도와줄까? 어떻게 하면 함께 살 수 있을까?’라는 메시지로 대응해야 한다. 그게 인간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진정한 온정이다.”

안락사 운동이 확산되면서 미국과 유럽의 비판자들은 우리가 생을 마감하는 더 나은 방법을 찾으라고 촉구한다. 지난해 11월 의사이자 저술가인 아툴 가완데는 ‘누구나 죽는다(Being Mortal)’를 펴냈다. 그는 의료인이나 요양 시설이 생명 연장에만 매달리지 말고 노화와 죽음을 성찰하면서 의미 있는 ‘웰빙’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썼다.

그러나 가완데는 안락사 문제에선 상충된 생각을 갖고 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의 삶 이야기를 끝내기를 원하며, 의료인은 환자의 마지막 나날에 가망 없는 치료로 큰 상처를 주지만 그런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인정했다. 또 그는 미국의 의사들이 환자에게 음식, 물, 약, 치료를 거부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옳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모델은 “실패한 정책”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궁극적인 목표가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죽음이 아니라 좋은 삶”이 돼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네덜란드는 삶의 질을 제공하려는 ‘완화치료(palliative care, 말기환자의 동통이나 고생을 완화해주는 처치법의 총체)’ 프로그램 개발에서 다른 나라에 한참 뒤졌다. 정착된 안락사 시스템 때문에 말기환자의 경우 다른 수단을 통해 고통을 줄이고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게 된 것이 그 한 가지 이유인 듯하다.

콜먼 대표는 의사가 환자의 자살에 도움을 주는 대신 더 나은 자살 예방책을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환자들에게 왜 죽으려고 하는지 물으면 그들의 대답은 거의 비슷하다. 혼자서 거동할 수 없다거나 가족과 친구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그러나 의사에게 환자의 자살을 돕도록 허용하는 것은 가장 안이한 대처라고 콜먼 대표는 말했다. 그보다는 환자가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남은 시간이 몇 주에 불과하다고 해도 말이다.

콜먼 대표는 “잭 케보키언이 자살을 도운 사람 대다수는 말기환자가 아니라 그냥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었다”고 지적했다. “한번은 그가 TV에 나와 ‘그런 사람에게 안락사가 더 필요하다. 그런 사람이 더 오래 고통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이다’고 말하는 걸 봤다.”

죽을 준비가 된 자 누구인가?

‘죽음의 의사’ 잭 케보키언은 안락사 운동가로 최소한 130명의 자살을 도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결국 2급 살인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8년 6개월간 복역한 뒤 가석방됐다(83세의 나이로 2011년 사망했다).

콜먼 대표도 그런 상황을 겪었다. 평생 선천성 신경근육질환과 싸워온 그는 2012년 바이러스성 폐렴을 앓은 후 급성 호흡부전으로 입원했다. 병원으로 가는 길에 응급요원 중 한 명이 남편에게 아내가 심폐소생술을 거부하는 유언장을 갖고 있는지 물었다. “남편은 그 질문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 유언장은 없다고 말하면서 내가 정규직으로 직장에 다닌다는 설명을 덧붙였다”고 콜먼 대표는 나중에 글에서 돌이켰다. “그러자 남편은 그들의 어조가 달라졌다고 느꼈다.”

한 달 뒤 콜먼 대표는 흉통으로 다시 입원했다. 의사는 치료를 원하는지 그에게 물었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나를 보면서 동정심과 진심 어린 우려의 마음에서 내가 그냥 죽기를 원하는지 정확히 알아야겠다고 생각한 듯했다. 하지만 장애인도 아닌 58세 여성인 내게 의사가 그런 식으로 말해 아주 불쾌했다.” 그래서 콜먼 대표는 또다시 “난 정규직으로 직장에 다니고다”고 말했다. “그러자 의사는 더 말하지 않고 가버렸다.”

내가 빌렘센을 만난 날 그는 암스테르담에서 약 65㎞ 떨어진 곳에 있는 옛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 친구는 87세로 치매를 앓고 있다. 40년 지기이지만 그 친구는 요즘 완전히 기억을 잃어 매번 처음 만나는 것과 같다. 빌렘센이라는 이름조차 모른다.

그 만남에서 빌렘센이 얻은 게 있다면 자신은 절대 치매에 걸리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죽음이 있다는 게 다행이다. 어떤 사람은 신이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생명을 가져가는 것도 그분의 몫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나이가 많이 들면 이 세상이 편하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이 온다. 더는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이 세상 말이다.”

나는 외할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으면서 할머니가 너무 오래 살았다고 판단하기가 내게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생각을 달랐다. 어머니는 최근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때 사람들이 네 할머니가 죽을 준비가 됐고 이제는 그냥 놓아 드려야 한다고 말할 때 난 무척 화가 났다. 그 마지막 나날이 잔인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나름대로 의미가 깊었다. 난 다시 네 할머니에게 뜨개질을 가르쳤고 계속 바쁘게 해서 휠체어에 갇힌 불편함과 권태를 잊게 해주려고 애썼다. 어느 날 오후 우리는 함께 옛 앨범을 들추며 회상에 젖었다. 네 할머니는 고교 시절을 이야기하며 사람들과 사건을 기억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어머니는 안락사를 택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말했다. 할머니도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마지막 몇 달 동안 어머니는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했다. 할머니가 스스로 음식 섭취를 못하자 어머니와 식구들은 정맥 급식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정맥 주사는 거부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 엄마를 탈수로 돌아가시게 하지는 않겠다”고 의사에게 말했다.

언젠가는 나도 우리 부모를 두고 그런 ‘불가능한’ 선택을 해야 한다. 두 분 모두 얼마 전 70세를 넘기셨다.

글=윈스턴 로스 뉴스위크 기자, 번역=이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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