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아지는 알코올 도수, 늘어나는 판매량…순한 소주 춘추전국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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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 울적한 때면 / 소주 한 잔 생각난다 // 태산보다 / 높은 시름도 / 거나한 취기에 무너지고 // 건너얄 / 폭넓은 강이 / 눈 앞에 와 출렁인네 (정재익 작 ‘소주 한 잔’)

시인의 말처럼 마음이 울적할 땐 소주 한잔이 생각난다. 반가운 이를 만나도 한 잔 걸치고 싶다. 동료와 함께라도 좋고, 동네 가게에서 소주 한 병 사들고 집에 들어가 아내와 오붓하게 잔을 기울여도 좋다. 그렇게 서민과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소주. 그 소주 시장에 연초부터 다시 전운(戰雲)이 감돈다.

포문은 업계 2위 롯데주류의 ‘처음처럼’이 열었다. 롯데주류는 이달 중순 유자 맛을 내는 알코올 도수 14도짜리 ‘처음처럼 순하리’을 내놓을 예정이다. 이 술은 소주인 듯 아닌 듯한 제품이다. 유자과즙이 들어가 관련법상 소주가 아니지만 ‘진한 처음처럼’(20도), ‘부드러운 처음처럼’(17.5도), ‘순한 처음처럼’(16.8도)에 이은 4번째 ‘처음처럼’이고 병도 360㎖ 용량의 소주병을 써 누가 봐도 소주다. 업계에서는 14도짜리 출시를 순한 소주시장 확대를 위한 전략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롯데주류도 그런 의도를 감추지 않는다. 이 회사 우창균 마케팅 부문장은 “시장 변화에 대응하고 처음처럼의 인지도 제고에도 기여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관련법상 알코올 도수 17도 미만은 TV광고를 할 수 있어 업계에선 광고도 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롯데주류는 광고 여부에 대해 ‘미정’이라고 했다.

‘처음처럼’의 공세에 소주업계 1, 3위인 하이트진로(참이슬)와 무학(좋은데이)은 긴장한다. 지난해 경쟁적으로 도수 내리기 경쟁을 펼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장 도수를 낮춘 새 제품을 내놓을 계획은 없지만 기존 제품 영업을 강화하면서 ‘ 14도짜리'의 시장 반응을 예의주시하고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소주 시장 2, 3위간 다툼 치열

특히 2위 ‘처음처럼’을 추격하고 있는 3위 무학은 공격적인 자세다. 무학은 참이슬과 처음처럼이 20도 내외에서 경쟁하던 2006년 일찌감치 16.9도짜리 '좋은데이'를 내놓고 ‘순한 소주’의 선두주자임을 자임한다. 무학은 16.9도짜리를 앞세워 시장을 꾸준히 늘려 전국 점유율이 2009년 8.5%에서 현재 15%에 달하는 것으로 자체 평가했다. 앞으로 30%를 향해 달려간다는 목표다. 이 회사 이종수 수도권 영업본부장은 “낮은 도수에 대한 연구는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며 “도수를 더 낮추는 것은 시장 상황을 보고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단 현 제품으로 점유율 확대에 힘쓰겠다는 것이다. 2위 롯데주류와 3위 무학 간에는 미묘한 신경전도 있다. 2, 3위는 분명하지만 무학은 2위에 근접한 3위라는 주장이고, 롯데는 무학과 '2중'으로 평가받는 것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아직은 차이가 많다는 것이다. 한 해 1조6000억원 규모로 추정되는 소주시장의 점유율이 공개되지 않는 탓이다. 한국주류산업협회는 과당경쟁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2013년 3월부터 업체별 점유율을 밝히지 않고 있다. 증권가에선 참이슬이 50% 내외, 처음처럼 17% 내외, 무학의 좋은데이를 14% 내외로 본다. 시장조사업체 마케팅 인사이트가 지난해 소주 소비자(1만3273명)를 대상으로 추정한 점유율은 참이슬 51.8%, 처음처럼 18.3%, 좋은데이 11.6% 순이다.

낮은 도수 경쟁에 업계 1위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처지다. 소주업계 강자 진로하이트도 14도짜리 소주를 주목하고 있다. 진로하이트는 처음처럼과 경쟁적으로 도수를 내리며 지난해 11월 도수를 17.8도까지 떨어뜨렸다. 지난해 말엔 가수 아이유를 새 모델로 내세웠다. 지난달엔 설을 맞아 ‘새해 모든 일이 다 술술 풀리시길 바란다’는 아이유의 광고 동영상도 선보였다. 이 회사 이영목 상무는 “14도짜리는 2위 수성을 위한 제품이 아니겠느냐”며 “도수를 낮춘 제품은 시장상황을 보고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소주의 저도수화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1973년 진로소주 25도가 1998년 참이슬 23도까지 내려가는 데는 25년이 걸렸지만 2004년 참이슬 21도에서 2014년 17.8도까지 3.2도 떨어지는 데는 1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소주업체들이 도수를 낮추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여성·젊은층이 차지하는 소주소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고 웰빙 분위기 속에 독한 소주를 기피하는 현상이 첫째 이유로 꼽힌다. 둘째는 판매량 증대, 셋째는 생산 비용 감소다.

알코올이 덜 들어가니 취기를 덜 느낀다. 종전과 같은 취기를 느끼려면 더 마셔야한다. 판매량이 늘어나는 이유다. 도수가 약해진다는 말은 소주의 주원료인 주정 비용이 준다는 뜻이 된다. 시판되는 소주는 희석식이다. 주정에 물을 타서 만든다. 주정이 덜 들어가니 비용이 줄게 된다. LIG투자증권에 따르면 소주업체들이 알코올도수를 경쟁적으로 낮췄던 2014년 상반기에 하이트진로 소주부문 매출은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8.8% 성장했다. 롯데주류의 소주 매출도 17.5% 늘었다. 이 기간 가격 인상은 없었다. LIG증권 서영화 애널리스트는 “소주의 알코올 도수가 19도에서 18도로 내려갈 경우 주정 투입량은 약 5.3% 준다. 원가 감소에 미치는 영향도 분명하다”고 했다.

도수를 내리면 원가가 주니 값도 내려야한다는 지적에 대해 소주업계는 ‘원가는 주정뿐 아니라 포장·물류·마케팅 요인 등 다양한 요인이 포함된다. 도수가 내려갔다고 값을 내리기는 어렵다’는 주장이다. 다만, 보해양조는 지난해 알코올 도수 19도에서 17.5도 낮춘 소주 ‘아홉시반’을 내놓으면서 용량을 기존보다 15㎖ 많은 375㎖로 했다. 도수 인하로 주는 원가를 ‘양’으로 보답한다는 취지다.

소주의 도수 한계가 어디까지 인지는 정답은 없다. 소비자가 결정한다. 소주의 도수가 낮아질 때마다 ‘과연 성공할까’ 우려가 있었지만 도수는 꾸준히 낮아졌다. 하이트진로 연구소 소주담당 김영근 연구원은 “알코올 도수 20도 아래로 내릴 때는 모험이었다”며 “몇 도까지라는 규정이 없는 만큼 소비자 입맛에 맞추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수도권 시장은 소주 전쟁터

하이트진로·롯데주류 같은 전국구 소주와 무학·보해 등 지방 소주업체가 수도권을 놓고 펼치는 대결도 볼거리다. 20세 이상 음주가능 인구는 3677만 명(2010년 기준 통계청 인구 총조사)으로 이 가운데 서울이 764만 명, 경기가 835만 명으로 서울·수도권에 43.5%(1599만 명)가 몰려 있다. 지방업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도권을 공략해야 하는 이유다.

현재 서울·수도권 전쟁에선 무학이 공세적이다. 점유율 80%를 넘기며 울산·경남 시장에서 절대강자인 무학은 부산에서도 지역소주 C1(대선주조)을 꺾고 지난해 점유율 1위를 차지했고 그 여세를 몰아 수도권 공략에 나서고 있다. 예전엔 주문이 오면 소주를 보내주는 소극적 자세였다면 지금은 적극적으로 시장 개척에 나선다. 서울·수도권 영업인력도 늘렸다. 현재 거의 매일 서울 강남과 여의도·홍대·신촌 등지의 주점·음식점을 직원들이 직접 찾아가거나 거리 홍보를 통해 ‘좋은데이’의 인지도를 높이고 있다. 보해양조도 17.5도 짜리 ‘아홉시반’ 출시를 계기로 수도권 공략에 적극 나서고 있다. ‘아홉시반’은 전국구용으로 수도권 주당들이 '아홉시반'을 외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마케팅 인사이트의 윤태선 연구본부장은 “가볍게 음주를 즐기는 분위기에 술 소비자도 남성 중심에서 여성으로 확대되고 있다”며 “도수 내리기 경쟁과 수도권 시장 확보를 위한 업체간 공격과 방어는 한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염태정 기자 yonn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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