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국정원장들의 불법 도청과 피해자 인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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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검찰 수사를 통해 드러난 DJ 정부 국정원의 불법 도청 실태는 충격적이다. 임 전 원장은 유선중계 통신망을 이용한 감청장비(R2)에 감청 대상 번호를 대량으로 입력해 사용토록 하고, 휴대전화 감청장비(CAS)를 개발하게 함으로써 무차별적인 24시간 도청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는 또 햇볕정책을 비판하는 인사들의 전화를 도청해 이들을 감시하고 정치권 인사들의 압박에 나서는 등 국내 정치에도 개입했다는 것이다. 신 전 원장은 재직 중은 물론 최근까지도 도청을 부인하면서 자신이 감청장비 폐기를 지시했다고 강조해 왔다. 그러나 2002년 3월 개정 통신비밀보호법 시행으로 감청장비에 대한 국회 보고가 의무화된 데 따른 부득이한 조치일 뿐 자발적인 폐기가 아니었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그는 특히 불법 도청을 숨기기 위해 검찰 수사를 받는 전직 국정원 직원들에게 진술을 번복하도록 회유까지 한 것으로 드러났다.

안기부의 도청 테이프 유출로 촉발된 이번 사건의 본질은 국가기관이 불법으로 주요 인사의 대화와 통화 내용을 엿들어 그들의 기본권과 인권을 침해한 범죄행위다. 더구나 국가기관에 몸담았던 인사들이 도청 테이프를 몰래 빼돌려 개인적 이득까지 취하려 했으니 일반 범죄자들의 수법을 뺨칠 정도다. 하지만 도청의 피해자들로선 자신이 도청당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불법 도청을 없애는 것만이 국민의 피해를 막는 길이다. 검찰이 임.신씨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높인 것도 도청을 근절해야 할 국정원장이 오히려 이를 묵인 또는 활용한 데 따른 책임을 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청와대와 열린우리당 내에서 불구속 주장이 나오는 것은 유감이다. 청와대는 어제 공식 입장은 아니라면서도 "불구속 수사 원칙에 비춰 사전 구속영장 청구는 지나쳤다"고 밝혔고, 열린우리당은 다른 사건과의 형평성 문제를 제기했다. 청와대와 여당은 강정구 동국대 교수 처리를 둘러싼 논란 과정에서 피의자의 인권을 내세워 불구속 수사를 강조했다. 그렇게도 인권을 생각해 불법 도청의 최고 책임자까지 불구속해야 한다면 수많은 도청 피해자의 인권은 누가 보호해줄 것인가.

일부 시민단체에선 국가기관의 범죄행위엔 눈 감은 채 도청 테이프 내용 공개를 끊임없이 요구해 왔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여권은 도청 테이프 내용을 공개할 수 있는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의 공개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도청 테이프의 주인은 바로 도청 피해 당사자들이다. 따라서 공개 여부에 관한 결정도 당사자만이 할 수 있다. 도둑으로부터 빼앗은 장물을 놓고 이득 분배를 논할 수 없다는 지적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