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선 2035

저는 '미생'의 만능 사원 안영이가 절대 아닙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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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현 기자 중앙일보 기자
이 현
JTBC 국제부 기자

직장 상사가 특파원과 국제부원의 연락처를 수정해 뽑아 달라고 했다. 전임자가 만들었던 원본 파일은 없어졌다. 엑셀 아이콘을 더블 클릭한다. 셀들을 마주 보다 그냥 닫는다. 행정팀에 가서 가위와 풀을 빌렸다. 바꿔야 할 번호들을 따로 뽑아 적당한 크기로 오려 붙이고 복사한다. 나는 엑셀을 못한다.

어른들은 젊은 세대라면 컴퓨터나 전자기기를 다루는 데 아주 능숙할 거라고 생각한다.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스마트폰이 이상하면 ‘막내’를 부르시지만 ‘막내’도 사실 잘 모른다. 부장님들은 “요즘 젊은 친구들은 파워포인트 다 잘하잖아”라고 가볍게 지시하지만, 그 때문에 오전 5시까지 PPT와 씨름을 하는 사원들이 적지 않다. 주말마다 시간을 쪼개 엑셀과 파워포인트 인터넷 강의를 듣는다는 것도 부장님은 모르신다.

외국어 능력이 출중하다는 선입견도 우리의 마음을 더 무겁게 한다. 위 세대보다 영어에 시간을 더 많이 쓴 것도 맞고, 토익도 800점이 넘는 게 맞지만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원문은 읽을 엄두가 안 난다. 동료 기자 중엔 사회부에서 평생 경찰서 지박령(地縛靈:한곳에 매인 혼귀)이 될지언정 국제부는 영어 울렁증 때문에 엄두가 안 난다는 녀석도 있다. 복잡한 외신 기사에는 나도 머리가 핑 돈다. 중국어를 공부하는 옆자리 동료를 보면서 중국어는 또 언제 배우나 한숨이 나온다.

 “원어민처럼 영어를 구사하는 유학파가 널렸는데 그런 나약한 소리 할 때냐”고 하실지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 유학파도 안 보이는 데서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미국 대학 출신 PD 지망생 후배 하나는 한국어 공부가 걱정거리다. 한자와 어려운 단어들이 발목을 잡는다. 스물다섯에 『마법천자문』을 펼치고 남몰래 공부를 한다. 유학을 떠난 동네 친구는 방학 때마다 늘 영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유학생이라면 당연히 영어를 잘하는 줄 아는데, 고급 영어는 따로 공부 안 하면 몰라.” 영어에 중국어·일본어·러시아어까지 거침없이 말하는 인턴사원 안영이씨는 드라마 ‘미생’ 속에나 있는 거다.

젊은이에 대한 편견은 노래방 회식 때도 예외가 아니다. 마이크를 잡으면 걸스데이나 아이유를 기대하는 선배들의 눈빛이 느껴진다. 하지만 내 스마트폰에 들어 있는 노래는 김광석·유재하…. 선배들의 “젊은 애가 클럽도 안 다니냐”는 단골 멘트도 신물 난다. 선배들이랑 똑같이 해 뜨기 전에 출근해 한밤에 퇴근하는 처지란 걸 왜들 모르시나.

 어른들이 생각하는 ‘요즘 젊은이들’은 ‘별에서 온 그대들’이 아니다. 인류가 한 세대 동안 진화를 해 봐야 얼마나 했겠는가. 다재다능한 재주들은 남몰래 눈물을 삼키며 부단히 익힌 것이다. 그러니 제발, “젊은 애가 왜 그러느냐”는 말씀만은 거둬 주시길.

이현 JTBC 국제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