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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한국인 여공(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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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국인 여공에 대한 차별 대우는 임금이나 숙소만이 아니었다. 식사도 외미에다 보리나 밀 20∼30%가 섞인 밥에 단무지 두쪽 어쩌다 생선도 나오지만 상한 고기, 그나마 조잡하게 지어져 마치 돼지먹이 같았다. 그래서 공장 주변의 일본인 사이에선 여공들을 안방의 돼지 또는 조선돼지라고 불렀다. 공장주변의 생선가게는 생선이 상하면 방직회사의 돼지들에게나 팔아야겠다고 했다. 어떤 때는 너무 심하게 부패해 생선에 벌레가 섞여 있기도 했다.

<착취기관 「상애회」>
그나마 양도 적어 여공들은 언제나 배가 고팠다. 배고픔과 중노동으로 여공들은 때로 공장안에서 졸기도했다. 더러는 무모한 도망도 기도했다. 그럴때마다 그들은 감독의 매질과 머리채를 낚아채이는 학대를 당했다.
여공들에겐 월 2일의 휴일은 「걸식의 날」이었다. 돈이 있으면 국을 사먹을수있다. 그렇지만 그럴 돈이 없다. 그래서 1∼2전으로 야채를 사고 새구이집이나 푸줏간에 가서 버려진 새 다리나 내장류를 주워서 근교의 언덕에 올라가 국을 끓여 먹었다.
공장 급식에선 고기류란 없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해서 영양보충을 하고 배고픔을 이겨야한다. 제주 출신의 여공들은 고향의 생선이 생각나 어쩌다 신선한 생선을 사려고하면 그건 조선돼지에겐 가당치도 않다면서 상한 것만을 팔았다. 그들이 휴일이면 요리하기 위해 오르는 언덕에선 바다가 바라보인다. 허겁지겁 국을 끓여먹고 바다를 보며 고향을 그린다. 그래서 기숙사로 돌아올때면 그녀들은 한없이 울고 또 울었다고한다. 여공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병이다.
병들면 일을 쉬어 안하고 그것은 다시 그를 더 오래 묶어두는 빚을 보탠다. 불행히도 이질이나 장티푸스등 전염병에 걸리면 환자는 즉시 격리수용되어 죽음을 기다려야한다. 배고픔과 중노동, 혹심한 매질로 여공들은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 기숙사에서 한 여공이 울면 선배여공이 왜 우느냐고 달래지만 달래는 소리에 울음이 섞여있다. 그래서 언니는 왜 울어라고 하면 그도 참고있던 울음이 터지고 급기야 기숙자는 울음으로 가득찬다. 고향을 생각하고 어버이와 형제를 그려보고 이국의 참담한 생활에서 쌓인 슬픔의 봇물이 터지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여공이 탈출을 생각한다. 그때문에 방직공장은 성곽처럼 높은 담을 쌓고 그위에 철조망을 쳤다.
이토록 비참한 여공들에게 또하나의 착취기관 상애회가 있었다. 상애회는 1920년 친일거두 박춘봉이 동경에서 결성한 단체다. 1923년 관동 대지진때 한국인이 대량학살 당하자 상애회는 3백명의 노동봉사대를 조직, 학살당한 한국인 시체처리및 이재민 집단수용등을 일본치안당국에 협력했다.
이 공로가 일본당국에 인정되어 후원을 얻게되어 1928년엔 재단법인이 되고 총독부경무총감을 지낸 「마루야마」를 이사장으로 앉혔다. 그러다 1938년에는 각지에 산재해있던 친일단체를 통합해 협화회로 발전했다. 협화회는 재일한국인을 2차대전의 인적자원으로 내몰던 동원개혁의 첨병이자, 고등경찰과 헌병의 앞잡이였다. 이렇듯 동족을 억압하던 일본의 주구 상애회가 가장 비참한 환경에 내동댕이 쳐져 있던 여공들에게 공포의 표적이었다는 것은 놀랍게도 최근에야 밝혀진 사실이다.
상애회의 회칙 가운데는 한국인근로자보호라는 명목아래 「민족차별을 철폐하고 일선융화를 기한다」 「조선 노동자를 위한 정신적 교화와 경제구조를 도모한다」고 규정하고 사업으로서 「조선인 근로자의 공동숙박 직업소개 인권상담 기술교육등을 한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이것은 간판일 뿐이었다. 상애회는 이런 간판에 따라 회비(처음엔 월50전)를 거두었다.
그렇지만 실지로 하는 일은 일본회사와의 계약아래 노무관리를 했다.

<야학으로 권리자각>
여공의 도망방지, 근로감독이라는 이름의 매질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이들 상애회의 악행중에는 강제결혼이 있다. 상애회는 독신인 조선인 남자에게 20∼30원의 돈을 받고 결혼을 알선한다. 상애회의 깡패들은 여공들을 작업장에서 불러내 결혼을 강요한다. 말이 결혼이지 인신매매나 마찬가치였지만 매질과 학대가 두려워 따를 수 밖에 없다.
아뭏든 결혼을 승낙하면 낯선 남자와 만나 3일을 보내고 머리를 말아올린 기혼녀의 모습이 되어 작업장으로 돌아온다. 상애회가 결혼주선에 나선 것은 일본에 와있는 근로자 중 남자가 3배에 이른다는데 착안한 사업. 1930년의 통계는 재일한국인은 남자 21만6천20명에 여자는 7만1천명 따라서 남자는 신부구하기가 어려웠다.
상애회는 이를 겨냥해 남자들로부터 돈을 받고 조선여성의 집단거주지인 방직여공을 강제결혼으로 내몬 것이다.
안방의 경우 상애회지부는 회사경내에 사무소를 두고 있었는데 지부장이던 전택영은 여공들을 시중들게 했고 그녀둘중의 3명은 첩으로 데리고 있었다고한다.
여공들의 슬픈 사연은 끝이 없다. 그런 여공들도 20년대 후반엔 차츰 권리의식이 자라갔다. 여공들의 자각은 야학에서 비롯되었다.
여공들은 모두가 글을 몰랐다. 그 때문에 고향에서 오는 편지는 회사에서 읽어주었는데 내용은 언제나 천편일률적이어서 재대로 읽어주는지 믿을수가 없었다
회답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은 담배를 사들고 공장 이웃의 노인을 찾아가 편지 써주기를 부탁하지만 그녀들이 늘어놓는 긴 사연은 단 몇줄의 글로 모두 담았다고 했다. 글을 읽고 쓸수 있는 능력이 그녀들에게는 절실한 소망이 되었다. 이럴때 글을 깨우쳐 주겠다고 나선 용사대가 노동조합의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여공들에게 글과 함께 권리에 대한 자각을 일깨웠다.
「조선독립만세 운동을 기억하라」 「원산의 노동자를 따르라」등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야학이 노동운동과 결부되자 회사는 감투를 내세워 이를 막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야학의 열의는 높아 갔고 권리선언도 산발적이지만 움트기 시작했다.
기록에 남아있는 최초의 여공항쟁은 1922년에 일어났다.
『안방의 춘본분공장의 선인직공 2백71명은 저임금과 일본인 공원과의 차별대우에 항의, 2윌27일 밤 파업에 돌입했다. 업주측도 완강해 해결은 어렵다(오오사까부지 보고서특비 1328호).』 여공항쟁은 20년대 후반들어 노동조합이라는 형태로 발전했다.
일본의 기록은 「선인노동 정의가 빈발하는 이유는 임금이 낮고 차별대우에서 오는 감정에도 기인하지만 다른 일면으로는 내지에 있어서의 노동운동의 진전, 특히 l925년에 창립된 재일조선노동총동맹의 영향을 받아 점차 노조에 가입하는 추세며 노동조합을 배경으로 노동쟁의를 일으키고 있다』고 했다.

<20년대에 노조태동>
여공들의 투쟁은 어떤 가능성에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나 희망은 잠시뿐이었다. 예기치 않았던 시련이 닥쳤다. 29년 뉴욕의 월가에서 시작된 대공황이 일본산업계를 강타한 것이다. 실업의 위협이 다가오고 근로조건은 더욱 나빠졌고 그 방직회사는 낮은 임금을 더욱 깎아내리고 조업을 단축하고 공원을 줄였다. 도처에서 산발적인 쟁의가 빈발했다.
안방도 1929년 8월엔 쟁의가 시작되었다.
『-종래에 비해 월수입10%내외의 감소와 차별대우에 항의, 기숙사에 수용된 선인여공 2백여명은 8월7일 새벽을 기해 파업에 돌입했다. 관할 서장이 중재에 나서 이튿날 일단 정상을 회복했다. 8월8일에는 안방의 전목공장, 10일에는 야촌공장에 부당해고에 항의하는 선인여공의 파업이 있었다.』
이렇듯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여공항쟁이 가장 격렬하게 타오른 것은 30년5월 안방에서였다 6일 본당국의 기록을 토대로 쟁의를 추진해 본다.
▲안방의 제3공장에선 30년2월부터 4월사이 3차례 조업단축, 임금조정으로 실질임금 40%를 깎고 20여명을 해고했다. 노조는 대응책을 논의, 5월3일 직공대회를 열고 시정을 건의키로 했다.
▲5월3일 경찰과 회사측의 삼엄한 경계로 대회가 좌절되자 선인직공 5백39중1백여명이 공장을 탈출,노조본부에 집합했다.
▲5월4일 이들은 17개항의 요구서를 회사에 체출했다. 임금의 회복, 기숙사와 식사등의 개선, 퇴직후의 귀향비 보장등이 그 내용이다.
▲5월7일 쟁의단이 공장 주변에 몰려가 데모를 벌이자 공장측은 경비원을 동원,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다수가 부상했으며 이 혼란속에서 90여명이 다시 탈출, 쟁의에 가담했다.
회사는 폭력저지에 이어 쟁의책임자 20여명을 집단 해고했다. 노조측은 이에맞서 철도부설공사장의 근로자80여명등 지원부대를 투입, 보강했다.
▲5월15일 회사책임자 면담을 요구하던 노조측은 실력행사에 돌입, 회사에 난입, 기물을 파괴했다. 이를 계기로 경찰은 강권을 발동, 이틀사이 노조간부등 1백여명을 검거했다. 체포된 노조원과 여공들은 심한 고문을 당했다.
▲노조는 5월24일을 기해 파업을 안방의 3개공장 6천여노조원 전체에 확대키로했다. 그러나 회사경찰이 일체가 된 방비로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무렵 이미 노조와 여공측의 투쟁은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 30년5월28일자 오오사까마이니찌는 쟁의단은 식량이 떨어지고 지도부도 붕괴됨으로써 해결 일보전 이라고 보도했다.
경찰은 여공들의 배후인 노조를 불순세력으로 규정했다.
▲쟁의단이 기진맥진 상태에 있던 5월28일, 회사는 농성중인 여공을 회사로 돌아오게 한다는 명목으로 상애회와 폭력단을 동원, 농성장소를 습격했다. 공원들은 바리케이드로 입구를 철폐하고 돌을 던져 저항, 이를 막아냈다.

<패배로 끝난 투쟁>
▲5월30일 경찰이 농성 장소로 출동, 조선인 여공 20여명을 포함, 노조측 70명을 검거했다. 식량도 바닥나고 마지막 지도부 마저 무너진 가운데 여공들은 최소선만을 남기고 귀사키로 했다. 남기로 한 여공과 돌아가기로 한 여공들은 서로 부둥켜 안고 울면서 헤어졌다. 남은 여공들의 투쟁은 처절했다. 상애회등 폭력단이 엄중한 감시망을 펴고 있어 수평사나 농민조합에서 보내주는 식량보급마저 받기가 어려웠다.
▲6월6일 일본 노동당계의 온건노조가 중재에 나서 쟁의 해결을 경찰에 일임했다.
경찰은 회사와 노조를 오간 조정 끝에 13일 쟁의종결을 실현했다.
①해고자에겐 인원의 해고수당을 지급한다. ②쟁의중의 일급과 쟁의비용으로 금일봉을 준다.
▲퇴직귀국자에게는 여비와 약간의 수당을 준다.
▲17개항의 요구사항은 유의한다는 것. 40일에 걸친 조선인 여공의 투쟁은 1백여명의 노조간부가 구속되는등 철저한 패배로 끝났다. 그렇지만 그 투쟁은 더 많은 것을 얻었다. 이들의 투쟁기간 재일한국인 단체는 식량 야채등을 보내 이들의 투쟁을 격려함으로써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무엇보다도 값진 소득은 인간회복이다.
방직회사의 조선돼지로 경멸당하고 우리도 인간이라고 말하면 「그렇다면 나비나 잠자리도 새냐」라고 조소당하던 식민지 노동자들이 인간 선언을 하고 인간회복을 위해 분연히 일어섬으로써 인간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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