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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보균 칼럼

권력의 고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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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보균
대기자

김종필(JP) 전 총리는 막힘이 없다. 그는 말을 고른다. 조문객에게 들려줄 훈수다. 그것은 원로의 고마움 표시다. 부인 박영옥 여사의 빈소를 지키는 그의 모습이다.

JP는 이명박 전 대통령을 맞는다. “그런 자리에 앉으면 괴롭고 고독하고 무거운 책임에 그냥 일어설 수도 없고, 5년 지탱한 것, 대통령이 별 대과(大過) 없이 지난 것 보통 일이 아니야. 그래서 위로를 드려야 해요.” 이 전 대통령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JP는 “정상은 외롭고 괴롭고 어디 갖다 붙일 데 없는 고독한 자리인데, (대통령을) 잘 좀 도와드리십시오”라고 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에게 한 말이다. JP가 연출하는 풍경은 강렬하다. 그의 정치 드라마는 파란과 곡절이었다. 구순(九旬)의 언어는 매력적이다. 여운은 길다.

 그가 언급한 권력 정상은 어떤가. 이명박 회고록을 들춰 보았다. “외롭고 힘든 때가 없었겠는가. 그러나 대통령이기에 좌절할 수 없었다. 귀 기울이고 의논해야 하지만 결코 힘든 내색을 해서는 안 됐다.”(『대통령의 시간』)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회상은 실감 난다. “청와대 안은 넓고 적막했다. 절간과 같았다. 나는 대통령이란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또 얼마나 고독한 자리인가를 피부 깊숙이 느꼈다.”(『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25일은 박근혜 대통령 취임 2주년이다. 임기 3년 차의 시작이다. 권력이 절정기를 맞는 시점이다. 국가 경영에 자신감이 넘친다. 그때쯤 대통령은 정상의 묘미를 즐긴다. 외로움과 위로란 단어는 맞지 않는다. 5년 단임제에서 통상적인 권력 흐름이다. 그런데 JP는 고독과 외로움을 말했다. 권력 내면에 정통한 그다. JP의 말은 박 대통령의 고단한 처지를 의식한 듯하다.

 박근혜 정권은 위축돼 있다. 권력은 얕잡아 보였다. 과거 정권들의 3년 차 모습은 기세다. 지금 청와대의 침체와 다르다. ‘박근혜 사람들’의 이탈은 그 느낌을 짙게 한다. 박 대통령은 “부동산 3법은 퉁퉁 불어터진 국수”라고 했다. 국회의 늑장 법안 처리에 대한 불만 표시다. 야당은 반발했다. 새누리당 이혜훈 전 최고위원도 그 대열에 섰다. “그 3법은 경제를 살리는 묘약이 아니다”고 했다. 이혜훈의 공개적 비판은 사건이다. 그는 원조 친박(親朴)이다. 그것은 박근혜 권력의 자존심을 상처 낸다.

 3년 차 권력은 극적인 장면을 생산한다. 노태우 정권은 3당 합당(90년 1월)을 했다. 그것은 한국 정치의 충격적인 재구성이었다. 김영삼(YS)의 3년 차는 역사 바로 세우기(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 구속)다. YS는 “영광의 시간은 짧았고 고뇌와 고통의 시간은 길었다”고 했다. 그 3년 차는 영광의 시간이었다. 김대중의 3년 차는 6·15 남북 정상회담이다. 한반도 정세는 급변했다.

 이명박의 4대강은 3년 차에 본격화했다. 4대강 사업은 논쟁거리다. 찬반이 여전히 갈린다. 하지만 그 치수 사업은 실적으로 존재한다. 집권 후반에 노무현 정권은 제주 해군기지를 모색했다. 임기 말에 사업 추진은 두드러졌다. 동북아 흐름은 격랑이다. 중국과 일본의 해군력 확대는 공세적이다. 제주 기지는 한국의 미래 안보를 상징한다.

 박근혜 정권의 3년 차는 무엇인가. 배수진은 쳐진 지 오래다. 박 대통령은 “올해가 경제 회복의 마지막 골든타임”이라고 했다. 청와대는 24개 핵심 국정과제를 내놓았다. 어젠다는 널려 있다. 하지만 우선순위가 모호하다. 4대강, 제주 기지 같은 국책사업도 없다. ‘박근혜 브랜드’는 선명하지 않다. 국민 행복시대, 제2의 한강의 기적은 구호로 흩어진다. 배수진을 이끌 장수가 누구인지. 뚜렷하지 않다.

 이완구 국무총리는 국정 혁신을 자임한다. 그는 장관들을 독려했다. “성적 나쁜 장관들에겐 해임 건의안을 행사하겠다”고 했다. 경제·사회 쪽 주요 장관들은 새누리당 의원들이다. 대부분 내년 총선에 재출마한다. 이 총리의 말은 파괴력을 높이기 어렵다.

 JP는 걱정한다. “5년 대통령 단임제는 짧고, 시간이 모자란다”고 했다. 단임 대통령은 호랑이 등에 올라탄다. 등에서 떨어지면 권력은 망가진다. 달릴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은 “세상 마치는 날이 고민이 끝나는 날”이라고 했다. 정상의 고뇌는 운명이다.

 3년 차 국정 리더십은 재구성과 집중이다. 권력의 자산은 한정돼 있다. 공무원연금 개혁의 시점이 다가온다. 그 전선에 힘을 쏟아야 한다. 그곳을 돌파하면 다른 개혁도 수월해진다. 박근혜 정권의 키워드는 ‘비정상의 정상화’다. 그 깃발 아래 정책, 브랜드 가치, 사람을 재정렬해야 한다. 사람은 권력의 자산이다. 권력의 동력은 그것으로 재충전된다. 대통령은 선택에 익숙해야 한다. 권력 정상의 묘미는 결단에서 나온다.

박보균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