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계획하지 않겠다는 계획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설 연휴의 마지막 날 밤을 의외로 평온하게 보냈다. 올해 안에 이보다 긴 연휴는 없다는 비보와 한 주만 더 지나면 한 해의 6분의 1이 사라진다는 절망적인 현실을 앞에 두고도 별 동요가 일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생각하다 깨달았다. 2015년을 맞이하며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

 연초가 되면 이런저런 목표를 다이어리에 적고, 월별로 대략적인 일정을 잡아놓아야 마음이 편안해지는 가벼운 정도의 계획중독자였다. 하지만 올해는 30여 년을 지속적으로 실패해 온 다이어트 계획도, 혹시나 하는 맘으로 세우곤 했던 결혼 계획도, ‘망신당하지 않을 정도’를 목표로 했던 영어 공부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지난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계획한 이런저런 일들에 치여 스스로를 무참히 착취하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올해 첫날 다이어리 첫 장에 이렇게 적었다. ‘계획 엄금.’

 마침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COO)이자 『린 인(LEAN IN)』을 쓴 셰릴 샌드버그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했다는 연설 내용을 읽은 탓도 있다. 그는 “당신은 어떻게 미래를 계획하며 살아왔나요?”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계획을 세울 때 삶을 오직 직선형으로, 단계별로 올라가는 사다리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꿈으로 가는 길은 사다리가 아니라 경력과 경험들이 엮인 정글짐에 가깝죠. 그러니 너무 계획에 집착하지 마세요.”

 3월을 코앞에 두고, 또 계획 본능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정초와 음력설에 이어 세 번째 맞는 찬스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작이 많은 3월에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많아진다는 뉴스를 봤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최근 5년(2010~2014년)간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소화불량·두통·복통·흉통 등의 질환을 겪는 사람을 월별로 계산해 보니 특히 3월의 발병 기록이 높았다는 것이다. 연평균 15만1800여 명 중 24%에 달하는 3만6600여 명이 3월에 병원을 찾았고, 특히 여성 환자가 남성 환자보다 두 배 정도 많았다고 한다. 연초에 세운 계획이 어그러지고 있다는 초조함과, 3월부터라도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계획은 나쁘지 않지만 계획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피곤해진다. 다이어리를 끌어안고 시간을 낭비하거나, 여전히 계획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에게 쉽게 실망하게 된다. 그러니 올해는 계획하지 않겠다는 계획을 지키는 데 만족하려 한다. 샌드버그의 조언처럼. “일단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가면서.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