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故 권철현 중후산업 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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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연합철강 전 사주인 권철현(權哲鉉)중후산업 회장이 18일 오후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78세.

고인은 1962년 일본 차관을 들여와 부산에 연합철강을 설립, 한국에서 고급 철강(냉연강판)을 처음으로 생산한 철강업계의 선구자다.

연합철강은 포항제철이 설립되기 전까지 일본에서 핫코일을 수입해 두께 0.2~1.5㎜ 의 냉연강판을 생산, 우리 산업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새마을운동 당시엔 양철 지붕용으로 이 회사 제품이 사용됐다. 연합철강은 수출에도 크게 기여해 72년에 금탑산업훈장을 받았고, 74년엔 국내 기업 중 처음으로 수출 1억불탑을 수상했다.

연합철강을 국내 최대규모(연산 1백만t)의 냉연업체로 키운 고인은 고 이병철 회장 등과 함께 재계 주요 인사들의 모임인 수요회의 고정 멤버였다.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도 고인은 평생 철저하게 검소한 생활을 고집했다. 가장 즐기던 점심 메뉴는 생갈비 두어대에 평양 냉면 한 그릇이었다. 부자 사이에도 엄격해 재산을 모으고 쓰는 법을 철저하게 가르쳤다.

평소 상인이자 기업인 집안임을 자부하며 상인은 남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고 말해 온 그는 박정희 정권 아래서도 기업인으로서의 소신을 굽히지 않다가 연합철강의 경영권을 빼앗기는 불운을 겪었다.

75년 오일 쇼크 후 박정희 정권은 때로는 무리하기까지 한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폈으나 당시 權회장은 손해를 보고는 수출을 못하겠다고 버틴 것이다.

미국에서 골수암으로 투병 중이던 어린 딸에게 치료비를 송금한 것을 정부는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걸었고, 결국 고인은 국제그룹에 연합철강의 경영권을 넘겼다.

86년에 국제그룹이 부실기업으로 전락해 해체될 때 당시 정부는 연합철강을 애초 창업주인 권철현씨에게 돌려주기로 하고 고인에게 인수자금을 마련하라고 통보까지 했으나 인수 하루 전날 급선회, 결국 동국제강이 연합철강의 경영권을 인수해갔다.

그 뒤 고인은 10여차례 이상의 소송을 벌이는 등 경영권 되찾기에 강한 집념을 보였으나 끝내 꿈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고인의 장남인 권호성 중후산업 사장이 AK캐피탈 컨소시엄을 구성, 법정관리 중인 한보철강 인수를 추진하자 고인은 한보철강 당진공장을 여러차례 다녀오며 철강업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았다.

최근 고인은 측근들에게 "한보철강을 인수하는 것을 보고 나서 인생을 마감하겠다"고 말하곤 했다.

권호성 사장이 추진 중인 한보철강 인수는 최근 중도금 완납이 끝났고 오는 7월 중순에 인수작업을 마무리짓게 된다.

유족으로는 미망인 김순자 여사와 권호성.헌성(국제평화전략연구원 이사장).은정씨 등 2남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02-3010-2270)이며 발인은 22일 오전 8시, 장지는 경기도 여주 선영이다.

이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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