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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만나면 갈등, 없으면 박탈감" … 평일 자살 40명, 명절 직후엔 43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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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설 연휴 마지막 날인 22일 서울 용산구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양모(89)씨가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양씨는 60년간 함께 산 부인과 2년 전 사별한 뒤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같은 날 오후 2시 서울 은평구 갈현동 내 단독주택 2층에서 세입자로 거주하던 A씨(40)가 질식사한 채 발견됐다. 테이프로 창문 틈새를 모두 막아 방 안을 밀폐시키고 번개탄을 피워 목숨을 끊은 것이다. 경찰은 A씨가 올해 들어 집세와 공과금 등을 제때 납부하지 못할 정도로 생활고를 겪고 있었다고 말했다.

 설 연휴가 끝난 직후 곳곳에서 자살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우울증, 생활고, 가족 갈등 등 이유는 다양하다. 중앙자살예방센터가 조사한 지난 5년간 명절 자살자 수 통계에 따르면 2008년부터 5년간 명절 연휴 다음 날 자살자 수는 평균 43.4명이다. 하루 평균 자살자 수(40.4명)보다 3명이 많았다.

 전문가들은 긴 연휴 기간 동안 갖가지 갈등이 극대화된 것이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평소에 작게 보였던 문제들이 연휴 기간에 더 커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명절은 일상적인 것의 의미를 실제보다 더 증폭시키는 기제로 작용한다”며 “가족 관계가 좋은 경우에는 더 큰 즐거움을 낳지만 문제가 있는 경우엔 갈등이 더 커진다”고 설명했다. 그는 “가족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박탈감을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가족 간 왕래가 거의 없는 소외계층은 평소엔 외로움을 견뎌내다가도 명절에 소외감을 훨씬 크게 느낀다는 것이다.

 대화가 단절되고 쉽게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업이나 파산, 부채, 생활고 등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는 사람이 늘고 있지만 가정 내에서도 불신이 커 도움을 청하는 대신 자살을 택한다는 것이다.

 지난 19일 설 연휴를 맞아 고향으로 가던 B씨(35)가 차 안에서 가족에게 수면유도제를 먹인 후 흉기로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거제 일가족 5명 사망사건’이 대표적이다. 조선소 하청업체에서 일하던 B씨는 아내 이름으로 1억5000만원 상당의 빚을 졌고 아파트에서 작은 원룸으로 이사했다. 박소영 세명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대부분의 남성들은 어려움이 있어도 명절에는 여유로운 척, 잘사는 척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고 있다”며 “문제를 털어놔도 가족들에게 지지받기보다는 비난받을 것이라는 절망감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공감과 소통, 교육이 해결책이라고 제시한다. 박소영 교수는 “가족에게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며 “소통을 통해 이해를 얻고 해결 방법을 찾아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신광영 교수는 “사회적 안전망이 사라지고 가족이 해체되는 상황에서는 교육이 해결책”이라며 “삶의 가치,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대를 갖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채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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