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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 속 '진주' 다시 반짝반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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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형제인 박정진(40·왼쪽) 진주햄 사장과 박경진(35) 부사장이 경남 양산 공장에서 소시지 ‘천하장사’를 검수하고 있다. [사진 진주햄]

“2006년 2월 1일 첫 출근한 날 들은 얘기가 직원들에게 전달 급여를 못 줬다는 이야기였어요. 속았다는 생각도 들었죠.”

 어묵 소시지 ‘천하장사’로 유명한 진주햄의 박경진(35) 부사장은 예전 일을 회상하며 웃었다. 네모파트너즈 컨설턴트 출신인 박 부사장은 아버지 박재복 진주햄 회장(2010년 작고)의 권유로 입사해 생산과 영업을 맡아왔다. 형 박정진(40) 사장은 씨티그룹글로벌마켓증권에서 기업 인수합병(M&A)·주식·채권 담당 상무로 일하다가 2013년 합류, 재무와 브랜드전략을 맡고 있다.

 태어날 때만 해도 세상에 둘도 부럽지 않은 재벌가의 황태자였지만, 그들의 청년기는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진주햄은 1980~90년대 국내 해운 톱3 기업으로 꼽히던 조양상선그룹의 계열사였다. 두 사람의 할아버지인 고 박남규(1920~2004) 회장이 1985년 인수했다. 진주햄은 당시 백설햄·롯데햄과 더불어 소시지 시장을 삼등분했었다.

 하지만 92년 제일생명이 정보사령부 부지 매매 사기사건에 휘말리면서 사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외환위기가 터졌다. 97년 제일생명이 독일 알리안츠에 매각되고, 2001년에는 조양상선이 파산하면서 그룹이 해체됐다.

 재무통인 형 박 사장은 당시를 이렇게 분석했다. “의욕이 너무 앞섰죠. 전세계를 커버하는 해운회사가 되겠다는 목표는 좋았지만, 매출액(1조)만큼 부채가 많았어요. 상장사도 아니라 자금 조달 방법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부채가 발목을 잡은 것이죠.”

 트럭 하나로 그룹을 세운 할아버지의 경영 이념(내실·안정경영)과 아버지의 꿈(세계적인 해운회사) 사이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대목이다. 결국 조양상선은 5년 가량의 부채 다운사이징 기간을 거쳐 결국 2001년 파산했다. 당시부채가 3000억원이었다.

 ‘천하장사’만 남은 진주햄 경영도 순탄치 않았으나 외환위기의 상처가 아물어가던 2002년은 기회였다. 월드컵 특수로 연매출이 950억원으로 상승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2003년 CJ 제일제당의 맥스봉이 출시되면서 매출액이 매년 10%씩 줄었다. 매출이 바닥을 치던 2006년 박 부사장이 입사했다. 입사 직후 박 부사장은 구조조정을 밀어붙였다. 직원을 1350명에서 2년만에 700명으로 줄였다. 그는 “노조에서 우리 집에서 피켓 시위도 하는 등 반발도 심했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 총대를 멨다”고 회고했다.

 변화가 가능한 것은 중국 덕분이었다. 수출을 시작하던 2007년도만 해도 연간 100박스에 불과하던 수출량이 2011년부터 대박이 나기 시작했다.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나면서 중국 시장을 휩쓸던 일본산 식품에 대한 우려도 한 몫했다. 2011년 3억8000만원이던 수출액은 지난해 77억원을 돌파했다.

 박 사장은 “중국에서는 거의 비슷한 짝퉁이 노골적으로 유통될 정도로 인기”라면서 “중국 국산 소시지보다 2.5~5배 비싸지만 안전하고 맛있는 먹거리라는 생각에 유아매장에서 압도적인 인기”라고 말했다.

 지난해 진주햄은 매출액 1200억원으로 경영은 정상 궤도로 돌아왔다. ‘천하장사 형제’로 불리는 두 사람은 이제 진주햄의 변신을 추진하고 있다. 그룹의 로고에서 ‘햄’자를 떼 종합식품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지난 1월에는 국내 1위 수제맥주점인 ‘카브루’도 인수했다.

 중국 등 수출도 강화한다. 박경진 부사장은 “한·일 월드컵 당시 맥주 안주로 천하장사가 많이 팔리며 매출이 급증했다”며 “지금 중국에서 대력천장(大力天將·천하장사의 중국 브랜드명)을 소비하는 중국의 아이들이 성인이 되서도 찾는 브랜드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20년 농사를 막 시작한 것이다.

이현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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