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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딱지치기 함께 한 '깡촌 친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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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야! 개새끼야, 지금까지 뭐하느라고 연락 한번 안했어.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1993년 초 어느날 오후. 내가 근무하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외국인진료소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햇볕에 그을려 검게 탄 얼굴, 1백62㎝에 불과한 왜소한 키, 허름한 점퍼 차림의 낯선 남자가 내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다짜고짜 욕을 해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한테 해코지를 하기 위해 외부인이 침입한 것으로 생각한 직원 서너 명이 놀라서 이 남자를 뒤따라 들어왔다. 이날 우리 직원들로부터 오해를 받았던 남자는 바로 내 소꿉친구 장봉수(張鳳洙.47.엠지산업개발 이사)다. 전날 TV방송 뉴스에서 나를 보고 근무처를 수소문해 찾아온 것이다.

연세대 의대에 재학 중이던 84년 전남 순천에 갔을 때 우연히 한 주유소에서 페인트 칠을 하고 있던 봉수를 본 게 마지막이었으니 근 9년 만의 재회였다.

나의 고향은 순천 매곡동이다. 파란 눈을 가진 내가 순천에서 성장한 데는 복잡한 배경이 있다. 나의 외증조부는 1895년 선교사업을 위해 조선 땅을 찾아 목포.광주 등에 여러 학교.병원을 세운 유진 벨(1868~1925)목사다. 전북 전주에서 교육.선교 사업을 하신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1889~1960)은 선교 활동을 위해 나의 아버지 휴 린튼(1926~84년)을 순천에 정착시켰다.

봉수와의 인연은 우리가 어렸던 60년대 초 시작됐다. 나는 5남1녀의 막내로 태어나 무척 개구쟁이였고 우리 집과 봉수네 집은 1백m도 안될 만큼 가까웠다.

난 5~6세부터 대전에 있는 외국인학교에 입학한 13세 때까지 8년 가량 아침에 눈을 뜬 뒤 종일 친구들과 함께 매곡동 일대를 무대로 뛰놀았다. 당시 우리가 즐겼던 놀이는 쥐불놀이.과일 서리.땅 따먹기.구슬치기.딱지 치기.팽이 돌리기.연 날리기 등이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밖에서만 놀았던 탓에 내 손등은 항상 갈라져 있었다. 당시 놀고 있는 나에게 가장 싫었던 게 "빨리 집에 들어오라"는 어머니의 말이었다.

우리는 여름과 가을이 되면 어느 집에 어떤 과일이 열리는지를 다 알았다. 몰래 남의 집이나 밭에 들어가 감.앵두.딸기.모과.호두 등을 따먹은 횟수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관상용으로 만들어진 인근 초등학교 양어장에서 몰래 낚시를 해 잡은 잉어를 갖고 뒷산으로 올라가 불에 구워먹기도 했다. 대보름엔 다른 동네 아이들과 서로 돌을 던지고 싸우는 '돌싸움'을 했다.

난 해마다 설날이 가까워지면 한 몫 잡겠다는 생각에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살았다. 친구 집을 돌아다니며 세배하면 다른 친구들보다 훨씬 많은 세뱃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나를 더 예쁘게 보셨는지 마음을 후하게 쓰신 것이다.

건어물 장사를 했던 봉수네 집을 가면 오징어를 실컷 먹을 수 있었던 것도 유년 시절의 행복한 기억이다. 한번은 오징어를 갖고 우리 집으로 찾아온 봉수랑 내 방에서 오징어를 몰래 먹다가 엄마한테 들켜 함께 쫓겨나기도 했다. 서양 사람들은 구운 오징어 냄새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나는 97년 중국에서 기차를 타고 평생 처음으로 북한에 갔다. 외증조부의 한국 정착 1백주년을 맞아 95년 세워진 비영리 인도지원기관 유진벨재단이 펼친 북한 결핵환자 돕기 운동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당시 창 밖으로 보이는 시골 풍경과 기찻길 옆에서 드럼통에 불을 피우며 놀고 있던 어린이들을 보면서 35년 전의 내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난 유년기의 놀이문화를 '새끼문화'라고 부르고 싶다. 친구들끼리 악의를 전혀 담지 않고 서로를 '새끼'라고 부르며 지냈기 때문이다. '새끼'는 분명히 욕으로 쓰이는 말이지만 그에 대해 상대방과 편하고 친한 사이일 경우 정감을 표현하는 용어가 아닌가.

어린 시절 '깡촌 촌놈'으로 자란 게 나에게 약점이 되기보다 오히려 나의 정신적인 성장에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남보다 많은 경험을 했고, 그 경험에서 많이 느끼고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4월 말 봉수는 딸을 시집 보냈다. 결혼식이 열린 경남 진해를 다녀오면서 내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했다. 나도 그동안 품에 안고 살아왔던 15살,13살짜리 두 딸을 언젠가는 출가시켜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한국사회의 인간관계가 각박해지고, 정이 메말라간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난 지금도 어린 시절의 풋풋한 사람 냄새를 그리워한다. 나의 휴대전화 벨소리는 소가 우는 소리인 '음메에~'다. 자랄 때 고향에서 들었던 그 소리가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난 봉수를 만날 때가 가장 행복하다. 조금만 틈이 나면 그에게 전화를 거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최근 한국의 경제사정이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아파트 골조공사 업체 간부인 그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질까봐 신경이 쓰인다. 경기가 나빠지면 봉수의 주머니 사정도 궁해질테니까….

정리=하재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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