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증세 안 된다”는 대통령과 “복지 양보 없다”는 야당 대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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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치권의 백가쟁명식 복지·증세 논란에 여야 지도자까지 가세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제 “경제 활성화를 외면하고 세금을 더 걷자는 것은 국민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당 신임 대표의 일성은 “복지 구조조정은 없다”며 “법인세와 고소득자에게 세금을 더 걷어 재원을 마련하겠다”였다. 여야 최고 지도자가 앞장서 한쪽은 ‘증세’를, 한쪽은 ‘복지’를 양보 불가능한 성역으로 선언한 꼴이다. 이래서야 국민적 대타협이 필요한 복지·증세 논의가 한걸음인들 앞으로 나갈 수 있겠나.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대통령 발언은 우선 현재 진행 중인 국민적 합의 가능성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적절하지 않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범국민조세개혁특위를, 새누리당은 별도의 ‘세금-복지 논의기구’를 통해 복지·증세 문제를 다루자는 입장이다. 국회 차원에서 복지의 우선순위와 조정 방안, 재원 마련 방안 등을 포괄적으로 논의하는 게 맞다. 그런데 대통령은 “국회 논의는 좋지만 국민을 중심에 둬야 한다”고 했다. 에둘러 표현했지만 여야 합의로도 증세는 안 된다는 의미다. 대통령은 여야 협의에마저 가이드라인을 주고 싶은 것인가.

 ‘증세=국민에 대한 배신 행위’라는 거친 표현까지 써 가며 경제 활성화에 대해 강한 집착을 보여야 했는지도 의문이다. 증세 없는 복지의 허구성에 대해서는 이미 국민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봐야 한다. 복지 재정 수요와 재원 조달 능력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지금대로만 해도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복지 지출 비율은 20년 뒤 현재의 10.4%에서 18.6%로 두 배로 늘어난다. 2050년에는 25.6%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을 넘어설 전망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다. 반면 세수 부족과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커 가고 있다. 지난해에만 11조원의 세금이 덜 걷혔다. 경제 활성화만 넋 놓고 기다리자는 건 목 빼고 비만 기다리자는 천수답 영농과 다를 바 없다. 경제가 안 살아나면 나라 빚만 잔뜩 늘리자는 얘기인가.

 문재인 대표의 복지 성역화와 부자 증세 주장도 마찬가지다. 그는 “복지는 지금보다 늘려야 한다”면서 고소득자 증세는 돼도 서민 증세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이는 정치적 언어를 넘어 국가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 무책임한 발언이다. 문 대표는 수권 정당이 되기 위해 “경제로 승부하겠다”고 했다. 복지는 부동(不動), 세금은 손쉬운 법인세 증세나 말하는 게 그가 말한 대안 정당, 경제 정당인가. 이래서야 2012년 대선 때의 진영 논리와 뭐가 다른가.

 사실 지금 정부의 증세 없는 복지를 손가락질하는 문재인 대표도 큰소리칠 처지가 아니다. 지난 대선 때 박 대통령은 5년간 135조원, 문재인 후보는 197조원의 복지 공약을 내놨다. 문 대표가 집권했다면 복지 논란이 더 심각했을 수도 있다. 복지·증세 논의는 어느 한쪽을 닫으면 답이 안 나오는 연립방정식과 같다. 증세 가능성도, 복지 구조조정 가능성도 함께 열어놓아야 비로소 풀 수 있다. 그러려면 대통령과 야당 대표부터 아집과 독선을 내려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