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을 이끌거나 몰려하지 말고 양이 되라 그게 21세기 지도자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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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호 21면

열흘 뒤면 을미년 설이다. 신문 지면마다 양 그림과 함께 설날 선물 안내가 한창이다. 그런데 양은 친숙한 듯 낯설다. 그래서 물었다.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멀고 멀리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짐승이 양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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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의외다. 핀잔 대신 칭찬이 돌아왔다. “이젠 정 부장도 전투 요원이 될 자격을 갖췄군. 그래, 우리는 지금껏 뻔한 게 아니라 모순되는 것, 애매한 것, 고정 관념 같은 것들과 전투를 벌였지. 12간지의 양이나 성경 속의 양도 그런 것 가운데 하나지. 그런데 정 부장, 잠 안 올 때 돼지를 세나 양을 세나?” 좋아할 틈도 없이 “그야 당연히 양떼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래 잠이 오던가?”

대답이 잘 안 나온다. 양떼를 세다 늘 실패했으니까. “그것 봐. 양은 영어로 ‘sheep’라고 하잖아. 그런데 h를 l자로 바꿔봐.” “아이구 sleep, 수면이네요.”

이 교수의 풀이는 언제나 나를 슬프게 한다. 엉뚱하게도 양이 잠과 연관된 것은 영어권에서 생겨난 속신이라는 거다. 공연히 양 세느라고 헛고생했구나 하고 생각할 틈도 없이 이 교수가 꼬리를 물고 들어간다.

한자의 진선미(眞善美)에도 진만 빼고는 모두 양(羊)자가 들어있다. 착할 선, 아름다울 미. 그것뿐이랴. 마이클 샌델의 정의에 관한 강의를 듣기 전부터 우리는 이미 옳을 의(義)자속의 ‘양’으로부터 많은 걸 배웠다. 염소 밖에는 길러본 적이 없는 우리가 양과 친하게 된 것은 우리가 한자권과 영어권에서 살아왔다는 증거란다.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우리의 지도자 상이 목자(牧者)의 이미지로 바뀐 것도 그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이 쓴 『목민심서(牧民心書)』만 해도 기존의 목민관에 다산이 접했던 천주교 신앙, 임금님이 용상에서 내려와 푸른 초원에서 양떼를 모는 모습이 겹쳐져 헷갈린다. 오늘날 한국 정치 지도자들이 서투른 것 역시 양을 쳐보지 못한 탓일 거라고 토를 달았다. 서구의 정치가와 기업가의 매니지먼트(management)는 양떼를 치는 비법에서 터득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옛날 목자는 양떼 앞에 서서 이끄는 형이었어. 나를 따르라 하는 인도형 지도자. 그런데 근대에 와서는 양들이 알아서 풀을 뜯어 먹으며 저절로 가게 하는, 즉 뒤에서 몰아가는 관리형 지도자가 나왔지. 셋째가 현대의 참여형 리더. 양떼 한복판으로 들어가 양들과 함께 움직이는 목자상이야. 그런데 미래형 지도자는….”

이 교수가 갑자기 뜸을 들인다. “미래형 지도자는 양털 가죽을 쓰고 양이 되는 목자야. 빅데이터를 이용해 양의 습성을 파악하거나 컴퓨터를 통해 자신을 양으로 시뮬레이션해버리는 거지. 실제로 양가죽을 쓰고 양떼를 친 종족들이 있었다는 거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양을 쫓는 모험』에도 그런 비슷한 대목이 나와.”

이 교수의 이야기가 다시 한 단계 점프했다. “그런데 말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양치기의 리더십보다 그 많음이 더 중요해. 한 마리 양을 가진 자가 99마리 양을 가진 사람을 샘내서 ‘그놈의 양들 몽땅 늑대가 물어가라’고 저주하는 사회에서는 자본주의가 불가능해. 반대로 99마리 양을 가진 양치기가 한 마리 양을 가진 사람을 보고 ‘100마리를 채우게 한 마리를 달라고 하는 사회 역시 자본주의는 성공 못 해.”

이 교수가 꿈꾸듯 말을 매듭짓는다.

“한 마리 양을 가진 사람이 자기도 99마리 양을 가질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는 사회. 99마리의 양을 가진 사람은 한 마리 양을 가진 사람이 언젠가 자기처럼 99마리의 양을 갖게 될 날을 위해서 모두 넉넉하게 풀을 뜯어먹을 수 있도록 더 넓은 초원을 찾아나서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만 자본주의가 꽃을 피울 수 있어.”

사촌이 논 사면 배 아파하는 사람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는 사람들. 이런 말은 익히 들어봤지만 이 교수의 양몰이 방법의 네 번째 유형은 처음 들었다. “더 넓은 초원으로 가자. 그곳에 우리의 ‘지(知)의 최전선’이 있다.” 이 교수의 말에 가슴이 짠하다.

글 정형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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