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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36년<23>|3·1운동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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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3·1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갔다. 향리로 돌아온 학생들의 역할이 컸다. 초기엔 종교계 학생등의 조직적인 활동이었으나 산간지방으로 넓게 번지면서 농민·노동자등 무명의 지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독립의 외침이 높아져 가는데 상응해 일본의 진압은 난폭해져 갔다. 난폭한 진압은 일본정부의 훈령이기도 했다.
「이번 소요사건에 대해 표면상으로는 가벼운 문제로 할 필요가 있으나 이면에선 사태의 재발이 없도록 엄중 처리해야 한다. 다만 외국인이 주목하는 잔학가혹의 비판을 초래하지 않도록 유의할 것이며…』 (3월31 일본 각의후 원경수상이 조선총독부에 보낸 전문)라는 문서가 이를 말해준다.

<무명지사 쏟아져>
처음에 평화적 시위로 출발했지만 총검앞에 희생이 늘어나자 민중도 실력행사를 했다.
일본의 기록은 『지방에 있어서는 3윌하순부터 4윌상순에 걸쳐 선내 일반의 민심이 점차 악성화해 경비가 소홀한 산간벽지에선 곤봉·낫·괭이·죽창등 흉기를 가지고 경찰관서 주재소 군경 면사무소등을 습격·파괴·방화를 일삼고 있다. 또 내지인 상점에 돌을 먼지고 순사보 헌병보초원의 집에 쳐들어가 가구를 부수고 말리는 경찰관을 참살하는등…』(조선헌병사령부평 조선소요사건의 개황) .
일본은 진압군을 파견했다. 조선헌병사령관은 본국 육군차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주민전체가 반항하고있어 더 많은 병력과 기동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병력증파는 4월4일 실현되었다.
『정부에선 필요하면 만주주둔법력을 잠정적으로 조선에 지원하도록하게 했으나 총독은 더많은 병력을 요청해왔다. 그들은 보병6개대대와 보조헌병 3백명을 요청했다.
각의에서 「다나까」 육군상은 조선에 파견하는 대대의 인원은 통상의 편성보다 숫자를 늘리고 보조헌병 4백명을 보내자는 의견이었다. 결국 폭동진압을 위해 내지(일본국내)주둔 각 사단에서 l개 대대씩 선발한 보병6개대대, 헌병65명, 보조헌병을 담당할 별도의 보병 3백50명의 조선파견을 의결했다』(수상 원경의 일기).
○…3·1운동은 주동세력이 행동에 나서면 주민들이 곧바로 합세해 산간마을도 수천명의 군중집회가 되었다. 선교사와 관계자의 증언등 자료를 토대로 만들어진 박은식의 『독립운동혈사』에는 1919년5월말까지에만 시위횟수 1천5백48회, 참가인원 2백4만6천, 사망자 7천5백9, 부상 1만5천8백49명 체포 4만6천3백6명을 기록했다. 그해 1년 전국2백18개군중 2백11개군에서 시위가 벌어졌으니 한국의 모든 지역, 모든 민중이 참가한 거사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들만 간추린다.
○…경기도는 3윌하순부터 독립운동이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일부지역은 면사무소 경찰서·헌병파견대등을 습격, 50여개기관이 파괴되었다.
약2천명의 폭민은 수원군 우정면화수경찰관주재소를 습격 포위했다. 주재순사는 발포·응전했으나 중과부적에 탄환마저 떨어지자 폭민은 순사들을 참살했다.
강원도의 봉화는 철원의 학생들이 선도했다. 양양에선 유림과 기독교가 거사준비를 하다 쌍천학교 교주 이석범등 주모자 23인이 사전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예정했던 장날인 4월4일 4천여 군중이 시위에 나서 구속된 지도자의 석방을 요구했다. 시위가 일어나자 군수와 서장이 도주했으며 이들은 일본군과 함께 진입해 총격을 가해 3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13명이 부상했다.

<군수·서장은 도망>
○…충남에서 가장 격렬했던 천안군의 시위는 3월14일 목천보통학교 학생들로부터 시작되었다. 20일엔 입장면의 광명여학교, 그리고 27일엔 직산면에서 궐기했다. 직산에선 헌병들이 총을 난사해 사상자가 생겨났다. 4월1일 병천장날 3천명의 군중이 시위에 나섰다. 병천주재 헌병대는 기관총을 난사해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날하오 시위군중은 병천∼천안간 전선을 절단하고 헌병파견대를 공격했다.
이화학당의 유관순(16)은 병천장터에서 헌병대의 기관총에 부모를 여의었으며 하오의 격렬한 시위를 지도하다 체포되었다. 그녀는 뒷날 재판정에서 『우리가 너희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지만 너희는 우리를 재판할 권리가 없다』고 했다. 그는 3년형이 선고됐으나 옥중의 만세로 7년으로 연장되어 복역중 고문과 학대로 옥사했다.
충북은 농민봉기였다. 음성군의 소이면과 삼성면에선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함께 시위를 벌였는데 일본군의 총격으로 18명이 사망하고 40여명이 부상하는 희생을 치렀다.
황해도에선 7만여명이 시위에 참가했으며 1백62명이 사망하고 3백23명이 부상하는 희생을 겪었다. 연안읍에선 3월l8일 장날을 택해 궐기했는데 조선인 면장·면서기등이 모두 참여했다.
안중근의 향리이기도한 안악에선 배영학교 학생을 선두로 3월10일 궐기했는데 일본군경은 부녀자도 체포 군중 앞에 나체로 희롱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가장 참혹한 사태는 수안의 학살이다. 『3월3일 약3백명의 군중이 수안의 헌병주재소를 찾아와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철수를 요구했다. 헌병은「조선이 독립했다면 물러가겠다. 그렇지만 일단 서울의 지시를 받아야겠다」고 했다. 군중은 물러갔다가 두시간후에와서 같은 요구를 했다.
헌병들은 발포, 5명이 즉사하고 또 다른 몇명이 쓰러졌다. 한 노인이 총격을 항의하자 역시 사살했다. 그 노인의 아내가 달려와 시체를 부둥켜안고 통곡하자 헌병은 조용히 하라고 소리치다 사살해버렸다. 그 다음날 아침 노부부 외 딸이 파견대로 달려왔는데 이번엔 칼로 전신을 난자했다』(현대사자료).
○…평안남도는 서울과 마찬가지로 3욀1일부터 시위의 불길이 올랐다 가장 처절했던 곳은 사천이다. 평양시 근교인 이 지역에선 반석교회가 중심이 되어 인근4개 교회가 함께 시위에 나서기로 계획하던중 일부 지도자가 체포되었다. 예정된 3월4일 송현근 목사를 선두로 1백50여교인이 시위에 돌입하자 주민들이 합세해 순식간에 수천명으로 불어났다. 선두엔 40명의 청년결사대가 앞장서 있었다.
원장시장 입구에 포진한 20명의 일본군 수비대의 총격으로 10여명이 쓰러졌다. 군중은 투석전으로 맞서 장터는 순식간에 전쟁터가 되였다. 15명의 희생자와 40여명의 부상자를 내면서 수의 힘으로 일본군을 압도, 일본인 헌병파견대장과 헌병보조원 3명을 처형하고 구속되어 있던 지도자를 구출했다.
무자비한 보복이 바로 뒤에 닥쳤다. 이튿날 5백명의 일본군경이 출동, 시위군중에 사격을 가해 43명이 희생되었다. 일본군은 이에서 그치지 않고 사천 원장등 3개면에서 4백명을 검거, 20일동안 야만적인 고문을 자행했다.

<영선교사도 체포>
평안북도도 시위에서 5백명이 희생됐다. 의주와 함흥에선 상인들이 철시하고 일본인에게는 곡식과 연료를 팔지 않기로 결의했으며 순사보·헌병 보조원도 포함돼 조선인관리들이 일제히 사표를 내고 시위운동에 호응했다.
대구에서 봉화가 오른 경북지역의 시위에선 안동이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다. 박은식의 혈사는 안동에서만 3배35명이 사망하고 6백10명이 부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당들이 주도한 안동의 시위는 지도자가 체포되자 그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다시 일어나고 일본군의 총격으로 사상자가 생기자 온 군민이 총궐기해 관공서를 장악하게되고 증파된 일본군이 총기를 난사함으로써 희생이 컸다.
영덕에서도 시위군중과 일본군경간의 일진일퇴가 계속되었으며 시위군중은 한때 경찰관을 무장해제 시켜 여관에 감금하고 관공서를 장악하기도 했다. 기독교 대구고보 계성학교 신명여학교로 연결된 대구와 독립운동은 일본군의 총칼에 밀린뒤 지하조직으로 되어 해외와 연결되는 지하단체로 발전했다.
경남은 남한6도중 가장 격렬해 경찰서 면사무소 통신시설의 피해가 가장 컸다고 헌병사령부 자료는 기록하고 있다. 이곳 시위중 동래일신여학교의 시위는 기록할만하다. 3월11일 전교가 시위에 나섰으며 주모자는 부산진주재소에 수감되었는데 이중엔 영국인 여선교사 2명도 포함되었다.
3·1운동의 거족적인 항쟁대열엔 기녀들도 참여했다. 수원등 여러곳 기녀들은 시위에 참여했는데 해주에선 독립의 의지를 표시하는 혈서를 쓰고 집단시위에 나섰다가 주모자 8명이 구속되었다. 진주에서도 『의기 논개의 넋을 이어 독립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고 선언하고 기녀집단이 시위대열에 참가했다.

<유림도 적극 가담>
○…남부지방의 만세운동은 유림단사건으로 이어졌다. 당초 유림은3·1운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경북의 유학자 김창숙은 서울에서 3·1운동을 목격하고 감동을 받았다. 그는 이땅의 선비들이 치욕을 씻는 길은 이제라도 독립운동에 나서는 일이라고 판단, 파리강회회의에 유럽대표를 파견하도록 제안했다. 거창의 곽종석도 이에 호응, 전국 유림의 뜻을 모으는 일에 나섰다. 파리에 보낼 글은 장해당이 쓰고 스승인 곽종석이 손질했다.
마침 이럴때 김복한등 경기지방유림들도 파리강화화의에 서한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음이 확인되어 곧바로 하나로 합쳤다. 이리하여 유림대표의 독립선언서가 만들어졌다. 3월23일 김창숙일행은 조선유림의 서한을 들고 상해로 향했다. 이들은 상해에서 파리로 가려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한을 영문으로 번역해 우편으로 보냈다. 이 사건으로 파리장서 서명자 1백37인을 비롯해 관계자 5백여명이 경찰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 과정에서 연로했던 곽종석 김복한 유필영 하용제등이 옥중서 숨졌다.
또하나 3·1운동의 거국적 궐기에 충격받아 민족대표로 나설것을 주저했던 경학원 대제학 김윤식은 부제학 이용직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작성, 일본당국에 냈다. 이 문제로 두사람은 구한말 대신을 예우해 일본정부가 내렸던 귀족의 작위를 박탈당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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