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너무 부러워' 남의삶 베낀 30대 여성에 법원 집행유예 선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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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중앙포토]

우연히 주운 신분증을 이용해 다른 사람의 삶을 베끼며 살다 구속 기소된 30대 여성에게 법원이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서울남부지법 형사2단독 김석수 판사는 다른 사람의 신분증으로 각종 신분증을 발급받고 이를 이용해 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은 혐의(사기ㆍ사문서위조ㆍ주민등록법위반 등)로 기소된 임산부 김모(32)씨에게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고 5일 밝혔다.

김씨는 중학생이던 1997년 대한항공 괌 추락사고로 아버지와 오빠를 잃었다. 가족이 남긴 사망보상금을 받아 경제적으로는 어렵지 않았지만 김씨의 마음은 급격히 위축됐다. 가족을 잃은 슬픔으로 학창시절 내내 우울증을 앓았고 결혼 이후에도 삶이 나아지지 않았다. 임신한 몸으로 결혼생활의 파국을 맞은 김씨의 머리에 불현듯 우연히 주웠던 음대생 이모(26)씨의 지갑이 떠올랐다. 잊고있던 음악에 대한 꿈이 떠오르며 이씨가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김씨는 이때부터 남은 삶을 이씨의 이름으로 살아가기로 했다. 이씨의 학생증을 이용해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았고, 이씨 이름으로 휴대전화 개통했다. SNS를 뒤지고 e메일 아이디와 비밀번호도 알아냈다. 증권계좌와 통장을 만들었고 이씨의 이름으로 개설돼있던 통장을 이용해 현금을 인출하기도 했다. 김씨는 또 구청을 찾아 성형수술을 해서 얼굴이 변했다”는 거짓말을 해 이씨의 이름으로 여권을 발급받았다. 제2금융권에서 이씨 이름으로 600만원을 대출받기도 했다.

그러나 만들어진 삶은 오래가지 못했다. 대출을 받은게 문제였다. 대출통지서를 받은 이씨의 가족이 경찰에 신고했다. 미국으로 유학가있는 딸이 한국에서 대출을 받았을리 없다는 게 이유였다. 경찰은 추적 끝에 김씨를 잡았고 임산부이던 김씨는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다. 법원은 김씨에게 다시 자유를 줬다. 김석수 판사는 “명의를 도용당한 이씨와 합의하고 범행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가 모두 회복됐고 사고로 아버지와 오빠를 잃어 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던 점을 고려했다”고 말했다.

채윤경 기자 pch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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