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7)제79화 육사졸업생들(250)|짧았던 생도생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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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일에 치른 소양시험결과는 3일에 발표됐고 그 하루 뒤인 4일 소양시험에서 탈락된 l백19명이 경기도시흥의 보병학교로 보내졌다. 탈락자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육사를 떠나고 난다음 3백30명의 최종합격자에게 제복이 지급되었다. 생도들은 난생 처음 넥타이 매는 법을 익히고 다음날 거행될 입교식에 대비했다.
5일 새벽 생도2기생들은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강당에 집결해 이한림부교장의 지휘하에 예행연습을 받았다.
당시 이부교장은 얼어붙다시피 잔뜩 긴장한 병아리 생도들에게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구령을 하고 엄격하고 무섭게 보여 생도2기생들로부터 「진시황」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상오 10시. 신성모국방장관과 채진덕육군참모총장을 비롯, 육본의 일반·특별참모및 바로 윗선배인 생도1기생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입교식이 거행되었다.
입교식에서 김홍일교장은 『제군들은 이제 4년제 육사의 자랑스런 첫 생도가 되었다. 높은 긍지로 구국 대열의 간성이 되라』고 훈시했고 식이 끝난 다음에는 생도전원을 일일이 불러세워 『장차 무엇이 되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이때 거의 모든 생도가 『육군참모총장이 되겠다』 『육군대장이 되겠다』고 대답했으나 유독 손완식생도(예비역소령·서울기업산업사장)만이 『계급이 높은 군인이 되기에 앞서 참다운 인간이 되겠다』고 큰소리로 대답해 눈길을 끌었다고 한다.
이날의 생도지휘는 입시에서 수석을 한 조병봉생도(예비역소령·국회의원)가, 생도선서는 소양시험에서 1등을한 김대영생도(예비역대령·전중정국장·육군행정학과교수)가 각각 맡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생도2기생들이 육사교정에서 지낸 기간은 통틀어 24일뿐이었고 그나마 정식 입교식을 마친 것은 가입교 닷새뒤인 5일이어서 실제 교육일수는 19일에 불과했다.
그 짧디짧은 교육기간에 생도2기생들이 받은 교육은 군의 기본훈련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제식훈련과 M1소총 기계훈련·사격술 예비훈련·당점조준사격등과 6·25발발직전인 23,24일 이틀동안 5∼6발의 실탄을 장전해 자격사격을 겨우 마친 정도였던 것이다.
호된 기압과 숨돌릴 틈 없이 몰아붙인 교육기간이었지만 두고두고 추억거리가 될 즐거운 시간도 없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입교식날 밤에 벌어진 오락회와 12일밤 생도1기생들이 마련해준 신입생도 오락회가 바로 그것이다.
이때 좌중을 휘어잡으며 돋보이게 활약한 생도는 당시 유일한 기혼자로 학교당국에 이사실을 감추고 입교했던 고 이장은생도(예비역중위)였다.
배재중학교 응원단장을 지냈던 그는 말잘하고, 노래 잘부르고, 춤도 잘추어 장안의 학생들은 그의 이름만대면 단번에 알 정도였다.
그는 오락회 사회를 자청, 『아- 인도의 밤이여, 아- 인도의 밤이로구나』로 시작되는 당시의 유행가 『인도의 밤』을 한구절씩 가르쳐가며 오락회를 리드, 딱딱해지기 쉬운 「군대식 오락회」를 흥겨운 놀이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통솔력이 뛰어나고 의협심과 책임감이 강했던 그는 51년2월 강원도현리전투에서 생도2기생 임관후 첫전사자가 됐다.
통일교 문선명목사의 수석보좌관으로 유명한 박보희생도(예비역중령)도 돋보였던 생도중의 한사람이었다고 한다.
국민학교 교사생활을 청산하고 육사에 입교했던 그는 훤칠한 키에 미남형으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논리가 정연하고 설득력이 있어 당시 동기생들 사이에 『장차 뭘하든 큰 몫을 할 것이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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