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6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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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나는 그들을 집 안으로 들이고 신동수와 함께 온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다. 얼굴이 창백하고 어쩐지 눈이 갈색으로 보이던 그는 바로 김근태였다. 그는 가끔씩 고교 동창이던 신동수와 접촉하면서 유신 선포 이후부터 도피 중이었다. 그는 유신시대 내내 한 번도 노출되지 않다가 팔십 년대에 광주항쟁 지나서 가장 먼저 회복된 민주청년협의회가 결성되면서 스스로를 공개했다. 김근태를 오랫동안 파악도 못하고 노려왔던 공안당국은 여러 가지 혐의를 걸어 그를 체포했고 김근태는 남영동 이근안에게 그동안 밀렸던 온갖 빚을 갚아야만 했다. 그는 그 무렵에 선구적으로 벌써 인천 공장에 들어가 있었고 활동영역은 인천 부근이었다. 그들이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할복한 김상진 추도를 위한 시위였다. 이제 칠십 년대 내내 전태일과 김상진은 하나의 상징이 되어갈 것이다. 바로 한 달 전에 베트남에서 미군이 손을 떼고 철수하자 남베트남 정부군이 일시에 궤멸하면서 사이공이 함락되었다. 베트남 전쟁은 종결되고 통일되었지만 이른바 '월남 패망 정국'이 몰아쳤다. 유신정권은 전국적으로 총력안보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사회안전법과 민방위법.방위세법 등을 통과시킨다. 그리고 소위 유신헌법의 비방이나 반대 또는 개정을 주장하면 법적 엄벌을 하겠다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그런데 엄포를 놓은 지 겨우 열흘도 못 되어 학생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대부분 학생들은 각 학교에서 그리고 문학 또는 연희와 관련된 문화패 조직들이 시위를 벌일 예정이었다. 나와 신동수나 김근태 등은 나이로 따져도 서너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그들의 제안은 심금을 울릴 만한 선언문, 즉 김상진의 죽음을 위한 추도문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그날 밤 심야에 써서 우리 집에서 등사해 가지고 유인물을 제작하여 현장으로 나가 전달할 예정이었다. 나는 조용히 소주를 마시는 그들 옆에 엎드려 선언문을 썼다. 되돌아보면 원고료도 안 나오고 걸리면 수년 동안 징역을 살아야 하는 그런 선언문을 칠팔십 년대 내내 여러 종류나 썼다. 어떤 경우에는 누가 죽은 뒤에 그의 저서나 약력에 올려진 글을 보면 내 것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여튼 밤을 꼬박 새워 제작한 유인물을 들고 그들은 새벽녘에 사라졌다. 김근태의 과묵하고 침착한 언동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유신 막바지에 다시 며칠간 서울에서 함께 활동하게 된다.

남은 얘기지만 집회 시위의 주동자는 나중에 문학평론가로 팔십 년대 말에 작고한 채광석이었고 여기에 시인 김정환이와 역시 내가 구치소에 있던 시절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평론가 김도연 등이 있었다. 김도연은 김정환과 내가 만들었던 무크 잡지 '공동체문화'를 이어받아 출판사도 했었다. 나중에 자기가 현장에서 읽었던 선언문을 내가 썼다는 걸 알고는 한마디 투덜거렸다.

- 나는 누가 썼는지도 모르고 그거 읽었다가 삼 년 반 살았는데 형님 물어내시오.

훨씬 뒤에 내가 공주교도소 살 제 고참 교도관들은 그들 셋이 여기서 살았다며 여러 가지 추억담을 들려주어 확실히 인연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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