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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글로벌 아이

수틀리면 공개하는 북한의 막무가내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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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채병건
워싱턴 특파원

“중대 제안을 해놓고는 하루 만에 공개하면 상대는 뭐라 생각하겠는가.”

 최근 미국 워싱턴의 한 외교 소식통이 북한이 제안한 ‘중대 조치’를 놓고 한 말이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지난달 10일 한·미 군사연습을 중단하면 북한은 핵실험을 임시 중단하겠다는 이른바 중대 조치를 공개했다. 그런데 그 전날인 9일 이를 미국 정부에 제안했다고 전달 시점까지 밝혔다. 이 소식통은 사견을 전제로 “정말 대화를 원해서 내놓은 중대 제안이라면 상대방인 미국의 반응을 기다리는 게 상식”이라며 “하지만 전달한 다음 날 제안 내용까지 공개했으니 상대방은 다른 의도가 숨어 있다고 여기지 않겠나”라고 설명했다. 미 국무부는 그렇게 반응했다. 곧바로 “암묵적인 협박”으로 일축했다. 군사연습을 중단하지 않으면 핵실험을 하겠다는 위협 아니냐는 얘기다.

 북한이 지난 1일 또 북·미 간 물밑에서 오고 간 줄다리기를 공개했다. 아시아를 순방 중이던 성 김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북한과 접촉 의사를 표명해 평양으로 초청했는데 오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북한은 이명박 정부 시절에도 수면 아래의 남북 접촉을 일방적으로 드러내 남북 관계가 황당해진 적이 있다. 2011년 6월 북한은 남측이 비밀 접촉에서 천안함·연평도 사건과 관련해 사과를 ‘애걸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남측 참석자 명단까지 실명으로 공개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북한이 뭔가를 공개하는 이유는 한국과 미국이 대화 의지가 없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이미 대화 메시지를 잇따라 내놓았다. 미국도 그렇게 보고 있다. 미 의회조사국은 지난달 21일 보고서에서 “비록 박근혜 정부는 북한에 상대적으로 강경한 태도를 유지해 왔지만 박 대통령은 평양과의 관계 개선을 임기 내 목표로 삼고 있다”고 명기했다. 미국이 완강하다지만 미 국무부 관료 출신인 데이비드 스트로브 스탠퍼드대 한국학연구소 부소장은 “오바마 정부는 미얀마·이란·쿠바와 했던 것처럼 북한이 진정성을 보여준다면 북한과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는 데 확신한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한 소식통은 “성 김 대표가 지난해 워싱턴 복귀 후 북한과 대화 방안을 모색했지만 소니 픽처스 해킹이 불거지며 분위기가 악화됐다”고 전했다. 소니 해킹이 없었다면 다른 상황이 진행될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북한이 지금처럼 북·미 간 진행 상황을 그대로 공개해 버리는 행태는 대화를 바라는 진정성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대미·대남 강경 조치에 나서기 위한 ‘명분 쌓기’라는 의구심만 키울 뿐이다. 북한 외교가 상식에 기반한 게 아님을 다들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 외교가 통하는 것도 아니다.

채병건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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