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우 전 대법관 퇴임사 뒤늦게 확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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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우 전 대법관이 10일 퇴임하면서 국가보안법 존폐 등을 둘러싼 이념적 혼란에 대해 "통일과 민족에 대한 열정이 지나친 나머지 자유민주주의 가치가 훼손되고 있는 상황이 걱정스럽다"며 충고를 남긴 것으로 18일 확인됐다.

이 전 대법관은 최근 법원 내부 통신망에 올린 퇴임사에서 "사회주의는 달콤하고 정의로운 것 같지만 이상에 불과할 뿐 현실을 오히려 퇴보시키는 사상임을 역사가 증명했다"며 "우리 사회에서 인권의식의 과잉으로 혹시 다른 사람의 권리나 이익이 훼손되고, 국가의 기반이 흔들리는 일은 없는지 유의한다"고 지적했다.

이 전 대법관은 퇴임식 때 별도로 퇴임사를 발표하지 않았다. 사실상 이번 글이 36년 법관생활을 마감하면서 후배 법관들에게 남긴 마지막 당부의 말이 됐다.

그는 수원지방법원장.서울지방법원장 등을 지냈으며 1999년 10월 대법관에 임명됐다. 지난해 9월 보안법 위반 사건 상고심에서 "북한과의 교류.협력이 이뤄지고 있다고 해서 북한의 반국가단체성이 사라졌다고 볼 수 없다"며 보안법 폐지론을 비판했다. 재판에서 원칙을 중시하는 스타일이지만 상대를 배려하는 자세 때문에 그를 존경하는 후배가 많다.

◆ "목소리 큰 사람들의 압력 이겨내라"=이 전 대법관은 "오늘과 같이 민주화된 시대에 사법부의 독립을 걱정할 일이 어디에 있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사법부 독립에 대한 위협 요인은 과거와 같이 국가권력이 아니라 각종 이익단체나 이념단체, 그리고 정치세력 등 목소리 큰 사람들의 압력"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정치권 또는 시민단체가 선거.시국 사건에서 판결에 불복하는 사례 등을 비판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는 특히 후배 판사들에게 "사회적 쟁점이 된 사건에서 목소리 큰 사람의 공격에 신경을 쓰지 않는지, 그 때문에 혹시 법률과 양심에 따른 진정한 정의의 선언을 왜곡시키거나 침묵하려는 유혹을 받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 전 대법관은 "그러한 압력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뚜렷한 소신과 용기가 필요하다"며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 달라"고 당부했다.

◆ "법관 생활 보람 많았다"=이 전 대법관은 함께 퇴임한 유지담 전 대법관이 퇴임사에서 "지나온 법관 생활이 후회스럽고 부끄럽다"고 밝힌 것과 달리 "보람이 많았던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이 전 대법관은 "모순과 불의가 지배하기도 했고 이념 충돌이 표면화되기도 한 시대에 재판을 해오면서 권력에 영합하지 않고 양심을 지키며 소신을 피력했다"고 밝혔다. 또 "제가 한 많은 판결을 국민과 역사 앞에 내놓으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법원을 떠난다"며 "국민과 역사의 평가를 기다리겠다"고 덧붙였다.

이에 앞서 유 전 대법관은 퇴임식 때 "권력에 맞서 사법부 독립을 진정코 외쳤어야 할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에는 침묵했다"며 "때로는 소신도 감춰가며 요령껏 법관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이 전 대법관의 글에 대해 법원 내부에선 "당당하게 떠나는 모습이 아름답다""뼈 있는 충고를 해줘 감사하다"는 반응이 주류를 이뤘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죄인처럼 법원을 떠나지 않고, 떳떳하게 자신의 판결로 평가해 달라는 그 뒷모습을 닮고 싶다"고 말했다.

하재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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