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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 아닌 경관이 되고 싶었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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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호 22면

도서관의 배면. 내부의 서가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예전 네덜란드의 로테르담(Rotterdam)에서 일하던 시절, 인근 도시 델프트(Delft)를 종종 방문하곤 했다. 로테르담에서 델프트까지는 기차로 십여 분 거리. 주말 벼룩시장으로 들썩이는 델프트로의 여행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강예린·이치훈의 세상의 멋진 도서관 <5> 네덜란드 델프트 공대 도서관

시장에는 강과 운하를 따라 델프트 블루(Delft Blue)라 불리는 파란 문양 도자기, 각종 골동품은 물론 치즈·청어·원예용품과 꽃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누가 왕년에 잘나가던 상업도시 아니라고 할까 봐 300년 동안 도시에 쌓인 물건들이 작은 도시를 터지도록 채운다. 벼룩시장을 구경하고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델프트 공과대학에 수학하는 친구를 방문하는 것이 다음 일정이 된다.

약속 장소는 주로 델프트 공대의 옥상(rooftop)이다. ‘방과 후 옥상’도 아닌 ‘도서관 옥상’이 약속 장소라니 이상한 말 아닌가. 하지만 이 도서관의 외관을 보는 순간, 이 말이 얼마나 당연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기둥은 조명의 역할도 하고, 열난방의 역할도 한다.

땅에서 옥상까지 걸어서
델프트 도서관은 마치 미끄럼틀처럼 장방형의 옥상이 기울어져서 땅에 닿아있다. 즉 땅에서부터 옥상에 바로 올라갈 수가 있는 것이다. 변덕스러운 네덜란드의 날씨 속에 어쩌다 화창한 햇살이라도 보일라치면 학생들은 이 옥상 잔디밭에 올라가 햇볕을 맞이한다. 샌드위치를 먹고, 대화를 하고, 아예 자리잡고 누워서 책을 읽기도 한다.

눈 쌓인 겨울은 도서관 이용에 더욱 창의적이다. 스노우보드를 타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도서관 ‘건물’이라기보다는 도서관 ‘지형’이나 ‘풍경(landscape)’에 가까운 모습이다. 그리고 이 들어 올려진 지형 아래에 서가와 서고가 있다.

옥상에 오르는 경사로 사이에 있는 도서관으로 들어가 보자. 델프트 블루와는 또 다른 파란색이 달려 나와 손님을 맞는다. 약 42㎞에 다다르는 책장이 파란색 선명한 벽 앞에 4층으로 쌓여있다. 이 거대한 서가가 곧 서고다. 마치 연구자로서 마주해야 하는 인류 지식의 양을 한 번에 보여주는 것만 같다.

서가 옆 도서관 홀 가운데에는 콘크리트 덩어리가 떠 있다. 잠망경처럼 도서관 옥상에 고개를 내민 하얀 색 원뿔(cone)의 하단부이다. 이 원뿔은 도서관의 경사진 옥상과 더불어 도서관을 상징하는 짝패다. 내부에 특별한 공간을 갖춘 집 속의 집이자, 도서관의 중심이기도 하다.

원뿔의 꼭대기에는 천창이 있고, 이곳에서 내려오는 빛의 기둥을 둘러싸고 4개 층의 열람실이 있다. 동그랗게 둘러 쌓인 열람실은 나선형 계단으로 층마다 연결되어 있으며, 벽에 있는 파란 서가로 바로 건너가는 다리가 있다. 보고 싶은 책은 지상에 닿지 않고도 구할 수 있으니, 여기 앉아 있으면 하루 종일 떠있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맨 꼭대기의 천창까지 더해져 시간이 잠시 한 데로 모인듯한 느낌을 더해준다.

빛이 떨어져 밝은 원뿔의 아래 공간은 자연스럽게 도서관의 중심 공간이 된다. 평상시에는 자유로운 열람실이었다가, 특별한 행사가 있으면 연회장이나 강연 홀, 전시장으로 자유롭게 쓰인다. 그만큼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공간이다.

“사람이 모이는 공간을 만들어달라”
실제로 이 도서관을 설계할 당시 델프트 공대가 네덜란드 건축가그룹 미카누(Mecanoo)에게 요구한 것은 책이 보관되는 정적인 도서관이 아니라 책을 통해 학생과 연구자들이 만나고 지식을 교류하는 공간이었다고 한다. 외부의 경사진 옥상정원은 물론 내부의 원뿔 하부의 유연한 프로그램까지, 책이 아니더라도 도서관에 올 이유들이 충분히 계획되어 있다. 나 같은 이방인마저 도서관에 오는 것을 주저하지 않게 만드니 계획은 성공적이다.

약 1000석(995석)의 열람석은 편안한 소파 의자부터, 삼각형 테이블, 카페 의자, 긴 테이블, 원뿔 내부의 빛 기둥을 바라보는 자리 등 다양하다. 저마다의 이유로 도서관을 들르는 사람들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다양한 가구들이 구비되어 있다. 장기적으로는 1400명 정도 되는 학생 수와 동수의 좌석을 갖출 계획이라고 하니, 델프트 공대 학생과 연구원들은 각자의 자리를 가질 수 있게 된 셈이다.

하나 더. 이 곳은 요즘 유행하는 친환경 건축의 선두주자이기도 하다. 이 건물이 지어진 시기가 근 20년 전인 1997년인데, 이때 이미 지금 건축에서 회자되고 있는 옥상녹화, 에너지효율성이 높은 입면, 냉난방에 유리한 지하의 수장고를 사용했으니 말도 안 되게 앞서간 셈이다.

무엇보다 도서관이 ‘건축’이 아닌 ‘경관’이 되고자 했다는 점, 그것이 바로 최고의 친환경적인 태도가 아닐까 싶다.



MECANOO 1984년 결성된 네덜란드 건축가 그룹이다. 5명의 건축가(Francine Houben, Henk Döll, Roelf Steenhuis, Erick van Egeraat, Chris de Weijer)에 의해 설립됐으며, 현재 창립 멤버 중 하나인 프란신 하우벤(Francine Houben)이 디렉터로 운영하고 있다. 델프트 공대 도서관 이외에도 영국의 버밍험 도서관(Library of Birmingham, 2013)을 설계했다. 2014년 버밍험 도서관 프로젝트로 영국왕립건축학회가 주관하는 RIBA 내셔널 어워즈를 수상했다.

강예린·이치훈 건축가 부부. 건축사사무소 에스오에이(SOA)를 운영하고 있으며,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도서관 산책자』『세도시 이야기(공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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