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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마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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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SK그룹이 얼마 전 로고를 바꿨다. 영문 SK 위에 나비 날개가 사뿐히 펼쳐진 새 로고의 이름은 '행복 날개'다. 고객과 기업이 모두 행복해지자는 뜻이란다. 다음달부터 간판 등을 새 로고로 바꾸는 데 1200억~1300억원이 들어간다. 이런 돈을 들여도 아깝지 않은 건 로고가 기업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로고의 원조는 중세 유럽의 문장(紋章)이다. 문장은 12세기 기사들이 얼굴까지 뒤덮는 투구를 쓰면서 탄생했다. 투구로 시야가 좁아져 피아(彼我)를 알 수 없게 되자, 방패에 무늬를 그려 구별했다. 초기 문장이 대부분 방패 모양인 것은 그래서다. 레온하르트는 '문장대감'에서 고대 그리스인은 원형 방패에 무늬를 새겼고, 로마는 군단별로 방패 무늬가 달랐다고 적고 있다.

왕족과 귀족들의 전유물이던 문장이 서민에게 이어진 건 상인 조합인 길드를 통해서다. 빵집은 빵, 재단사는 가위, 목수는 도끼와 자 등을 문장으로 만들어 썼다. 주방용 칼의 대명사 헹켈의 쌍둥이는 대장장이의 심벌이었다. 창업주 요한 피터 헹켈은 독일 졸링엔 마을에서 이 지방 영주에게 군인용 단검을 납품했는데 그때 쓰던 문장을 1731년 상표로 등록했고, 이게 지금 쌍둥이표 헹켈의 상징이 됐다.

세계 최대 식품 회사 네슬레의 심벌마크 '작은 새 둥지'는 스위스 네슬레 가문의 문장을 변형한 것이고, 캐딜락의 라디에이터 그릴에서 빛나는 왕관과 방패 모양의 엠블럼은 캐딜락 가문의 문장에서 따온 것이다. 포르셰의 엠블럼은 슈투트가르트시(市)의 문장 중 '앞발을 쳐든 검은 말'에서 빌려왔다.

우리는 하루 평균 1500개의 로고.엠블럼 등 기업의 얼굴을 만난다고 한다. 이들 중 최고의 '얼굴'을 광고대행사 사치앤드사치의 대표 케빈 로버츠는 '러브 마크(Love Mark)'라고 불렀다. 최고의 기업은 고객의 가슴 속에 '사랑처럼 깊은 자국'을 남긴다는 뜻이다. 그는 러브 마크 기업으로 할리 데이비슨, 스타벅스 등을 꼽았다.

그러나 우리 기업 중엔 딱 떠오르는 러브 마크가 없다. 흔히 정치와 경제는 그 나라 국민 수준을 따라간다는데, 그래서일까. 로고만 봐도 절로 가슴이 설레는 '얼굴'-한국의 러브 마크가 보고 싶다.

이정재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