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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류 독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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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918~19년 스페인 독감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젊은 병사들이 무더기로 숨졌다. 반면 노인 희생자는 유난히 적었다. 미국 정부는 백신을 얻기 위해 "살아남으면 풀어준다"는 조건으로 나이 든 62명의 사형수에게 생체실험을 했다. 그러나 늙은 죄수들은 멀쩡하게 교도소를 걸어나갔다. 실험에 참가한 젊은 의사만 숨졌을 뿐이다.

감기(cold)와 독감(influenza)은 전혀 다른 병이다. 코와 목에 염증이 생기는 감기는 콧물과 기침이 나오는 가벼운 질환이다. 독감은 고열과 폐렴 증상까지 동반해 심하면 사망에 이른다. 독감은 다행히 예방백신과 치료제가 있다. 노인들이 스페인 독감에 내성을 보인 것도 1850년대 말 유행한 비슷한 유형의 독감을 앓아 면역체가 생겨난 때문이다.

최근 조류독감 경보로 선진국들이 독감약 사재기에 나섰다. 현재로선 스위스의 로슈가 독점생산하는 타미플루가 유일한 예방.치료제다. 바이러스 증식에 필요한 효소 작용을 차단시켜 바이러스를 죽이는 약이다. 경쟁 제약업체에 먹힐 뻔한 로슈는 신이 났다. 올해 타미플루 매출액은 최소 7억 달러를 웃돌 전망이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타미플루에 앞서 '아마타딘'이라는 값싸고 효과적인 약이 존재했다. 새로운 B형 독감에는 듣지 않아 급속히 도태 중인 비운의 약이다. 조류독감에 걸린 닭과 오리에게 마구 사용하는 바람에 내성이 생겨난 것이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최근 중국과 동남아에 대해 인체용 독감약을 가금류에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조류 독감 바이러스가 저항성을 얻으면 그나마 값비싼 타미플루까지 무용지물이 될지 모른다.

아직 공포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예고된 재앙이 현실화하는 경우는 드물다. "세균을 찾아라. 그 세균을 백신으로 활용하면 인간은 바이러스와 맞설 수 있다." 120년 전 프랑스 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의 충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인체 또한 간단하지 않다.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나 매독.결핵균은 인체의 저항으로 예전보다 독성이 한결 줄어들었다. 노인들은 지독한 스페인 독감도 이겨냈다. 어떤 약보다 예방이 우선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충분한 휴식과 손을 자주 씻고 물을 많이 마시는 길이 조류독감에 맞설 최선의 방책이라고 충고한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