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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5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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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지금은 어른이고 배우가 된 그의 딸이 당시에 여고생이었는데 아버지 생활에 불만을 품고는 집을 나가버렸다. 아비로서의 걱정과 근심이 그의 마지막 영화 속에 가득 배어 있던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우연하게도 이만희는 작품에도 없는 장례식 장면을 넣었는데, 영화 끝 부분의 마무리에 대해서는 그에게 책임이 없었지만 제작자와 함께 싸잡아 욕하면서도, 감독 이만희가 느닷없는 착상으로 넣은 벽지 마을에서의 장례식 장면은 지금도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명장면이다. 참으로 세상사는 기묘하다. 잡혀가고, 두드려 맞고, 감옥 가고 하던 시절에도 내 벗들은 한편으론 지옥의 잔치처럼 절반은 신명으로 버티었다.

김지하가 남도 쪽으로 잠적하던 무렵이었을 것이다. 서울대 총학생회의 연극반 학생들이 나를 찾아왔다. 제일 처음에 온 것이 김석만이었는데 뒤이어 춤꾼 이애주, 소리꾼 임진택, 학생 가수 김민기, 탈춤꾼 채희완이며, 국악쟁이 김영동, 나중에 영화 감독이 된 장만철(장선우) 등과 합류하게 된다. 그들은 나에게 '강도 형님이 당신 없어지게 되면 석영이 형님에게 찾아가서 일을 함께하라'고 일렀다는 것이었다. '강도'란 당시의 젊은이들 사이에 알려진 김지하의 별명이었다. 나중에 이들은 이른바 문화운동 1세대로 불리게 되는데 이들이 또한 나의 별명을 지어서 전국화하게 된다. 내 별명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구라 형님'이었다. '구라'라는 것의 어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말 잘하는 자, 또는 장광설을 펴는 자라는 뜻일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접시를 잘 돌린다'라고도 하는데 역시 구라가 보편적인 말일 것이다. 아마도 내가 놀이판에서 약장수라든가, 흘러간 옛날식의 재담으로 좌중을 웃기는 재간을 보고 그렇게들 별명을 지었던 것 같다. 내 별명 구라는 젊었을 적엔 그런대로 내 직업 또한 이야기꾼인 '소설가'이니까 못들은 척하고 받아 주었지만,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오십 대의 후배들과 주석에서 만나면 가끔씩은 '황구라 형님'이란 말이 나오는데 어떤 때는 그냥 못들은 척하고 어떤 자리에서는 화를 내기도 한다. 언젠가는 라디오 인터뷰를 하는데 버젓이 대중적인 공개 방송에서 사회자가 '구라 선생'이라고 불러서 당황하고 야단을 쳤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속내로 말하자면 까짓것 '작가라는 업이 천업이거늘' 내가 무슨 고관대작이라고 늙마에 와서 존경받고 살려느냐 하는 마음이 있다. 그렇게 보면 아직도 나는 '황구라 형님'으로 불릴 만큼 대중과 가까이 있고 젊은 게 아닌가.

기왕에 '구라' 얘기가 나왔으니 이른바 '조선의 3대 구라'라는 말이 나오게 된 연유도 밝혀야겠다. 대개는 문단 후배들과 문화운동 쪽의 후배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던 소리인데, 그 분류로는 두 종류가 있다. 한가지는 백기완, 방배추(방동규), 황석영을 3대 구라로 치기도 하고 가운데의 방모를 소설가 천승세와 바꾸어 넣기도 한다. 후자는 대개 죽은 채광석을 비롯한 팔십 년대의 문단 후배들이 그렇게 편성했던 것 같다. 요즈음에는 이 가운데 자리에 다시 북한의 소설가 홍석중을 넣어 일컫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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