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4 조치 해제 등 북한이 원하는 유화책은 빠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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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19일 청와대에서 통일부·외교부·국방부·국가보훈처 등 4개 부처로부터 통일준비 분야 업무보고를 받았다. 박 대통령은 “남북 교류협력의 질을 높이고 작은 협력부터 이뤄가려면 조속히 남북 간에 통일 준비를 위한 실질적인 대화가 시작돼야 한다”며 “북한이 호응해 올 수 있는 여건 마련에 노력해 달라”고 주문했다. 왼쪽부터 정홍원 국무총리, 박 대통령, 류길재 통일부 장관, 한민구 국방부 장관. [박종근 기자]

외교안보 부처의 19일 새해 업무보고에선 북한이 기대하는 ‘통 큰 대화’ 제안이나 ‘대북정책의 대전환’은 없었다. 대신 평화통일기반구축법(가칭) 등 법제 마련이나 통일 인재 양성 등 통일을 위한 기초체력과 골격을 갖추는 데 방점이 찍혔다. 그래서 “백화점식 제안만 있고 북한을 대화로 이끌 내용은 없는”(고유환 동국대 북한학 교수) 구상이라는 비판이 뒤따랐다.

 통일부는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3월 발표한 ‘드레스덴 구상’을 강화하는 방안으로 3대 통로(민생·환경·문화) 개설 등의 남북교류협력 추진 계획을 보고했다.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1일 신년사에서 “올해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열어 가자”고 제안한 데 대한 호응인 동시에 ‘다양한 분야의 통로를 통해 남북관계를 다지자’는 역(逆) 제안인 셈이다.

지난해 10월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차 온 황병서 북한 인민군 총정치국장도 “오솔길을 대통로로 열어 가자”고 말했었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남북 간에 협력할 수 있는 부문에서 몇 개라도 (통로를) 열어야겠다는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통일부는 남북 철도 연결, 북한에 복합농촌단지 조성(민생), 공유하천 공동관리(환경), 서울과 평양에 ‘남북겨레문화원’ 개설(문화)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반면 북한의 비핵화와 남북관계 개선에는 ‘선순환’이라는 해법을 제시했다. 남북관계 개선에 비핵화가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입장이다. 박 대통령이 12일 신년기자회견에서 “비핵화가 전제조건은 아니지만 이 문제 해결 없이는 평화통일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언급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기본적으로 남북 대화가 진전되면 자연스럽게 6자회담을 포함해 비핵화 대화 노력을 추동하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비핵화를 중장기 목표로 놓고 남북대화를 우선 시작해 볼 수 있다는 의미다.

 5·24 조치 해제나 금강산관광 재개 등 북한이 희망하는 대북 유화책은 업무보고에 포함되지 않았다. 정부 관계자는 “일단 패를 보여주면 북한이 대화에 나오는 대신 더 큰 보따리를 요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을 대화에 나오게 하려면 핵심 제안은 전략적으로 아껴둬야 한다는 것이다. 대신 나진·하산 물류사업 가속화나 남북경제공동체 인프라 구축사업 등 5·24 조치의 예외사업들을 추진하겠다는 내용이 업무보고에 담겼다. 5·24조치 자체는 유지하되 ‘유연화’를 모색하는 셈이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금강산 관광 중단은 북한의 핵실험이 아니라 우리 관광객 피살로 촉발된 것”이라며 “여기에 대한 사과와 방지대책 등을 남북이 먼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통일부가 무색한 ‘통일’ 나열=업무보고에선 통일부를 비롯해 모든 부처가 ‘통일준비’ 항목을 빼놓지 않았다. ‘평화통일 신뢰인프라 구축’ ‘글로벌 통일네트워크 구축’(이상 외교부), ‘통일준비 국방역량 강화’(국방부) 등의 용어가 등장했다. 국방부는 보고용 PPT자료 34장 가운데 통일이라는 단어를 20번 언급했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통일준비를 위한 국방외교를 펼쳐 나가겠다”고 보고했다. 국가보훈처도 업무보고 책자에서 통일이란 단어를 27차례나 사용했다. 보훈처는 “국가보훈의 진정한 의미는 평화통일을 이룩하는 데 있습니다”라고도 했다.

 하지만 정부 업무보고에 대해 전문가들은 “제안만 있다”고 우려했다. 여러 제안이 북한이 대화에 응해 남북관계가 개선되지 않으면 성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연세대 문정인 교수는 “모든 부처가 관심을 가지고 통일준비를 하겠다는 의지는 높게 평가한다”면서도 “하지만 우리의 계획이 현실화하기 위해선 북한과 대화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대학원대 신종대 교수는 “비전과 청사진을 제시한 것은 좋지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며 “비공식 채널 가동을 병행하지 않으면 자칫 변죽만 울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박인휘 교수는 “정책과제로 제시된 여러 내용이 추상적이고 과연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 의구심이나 궁금증이 드는 부분이 많다”며 “통일 준비를 위한 의욕과 의지가 앞서다 보니 실현 가능성이라는 근본적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 비전이 제시된 것 같다”고 말했다. 

글=정원엽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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